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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1.08 인생의 세 가지 고개

우리를 기다리는 인생의 세 가지 고개(人生に待ちうける「まさか?」の坂 )

오르막 고개 ․ 내리막 고개 ․ 설마 하는 뜻밖의 고개

 

인생에는 세 가지 고개가 있다.

오르막 고개와 내리막 고개 그리고 설마 하는 뜻밖의 고개.


뜻밖의 고개라는 인생의 덤과 같은 행운은 어느 날 우연히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예기치 않은 모습으로 다가오는 거라고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나는 대학에서 영어교육을 전공했다. 대학을 졸업한 1980년 봄 5월부터 한 고등학교에서 길지도 짧지도 않은 11년간을 영어교사로 근무하였다. 그러다 느닷없이 1991년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떠났고 도쿄 히가시나카노(東中野)라는 아담하고 조용한 동네에 첫 보금자리를 마련하였다. 그 때만해도 히가시나카노에는 한국인이 별로 없었다. 여섯 살 큰딸아이와 세 살 작은아들 나 이렇게 세 명 모두 일본어는 깜깜 젬병이었다. 우리 집 네 식구 중 유일하게 일본어를 할 줄 알아 동네 슈퍼에서 먹고 사는 데에는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던 건 그나마 더듬더듬 거리더라도 돈 계산이 가능했던 남편의 알량한 일본어 덕분이었다. 돌이켜보면 그야말로 온 식구가 좌충우돌 천방지축 허둥지둥 대던 격동의 5년간이었지만 돌아갈 수만 있다면 다시 돌아가고 싶은 내 인생에서 최고조로 다이나믹하고 흥미진진했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희희낙락했던 좌충우돌 5년간의 일본 도쿄생활을 뒤로 하고 1996년 서울로 귀국하였는데 떠나기 전과 후

나나 우리 가족에게는 크고 작은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다. 내게 크게 달라진 점 한 가지를 꼽으라면 정식으로 학교에서 배운 게 아닌 난생 처음 살아본 타국 일본에서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 생활 속에서 백프로 일본사람 틈바구니 속에서 온 몸으로 익힌 생활일본어 능력?이 아닐까 한다.


그 땐 그랬다. 일본어 말하는 것 하나만큼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넘쳤다. 대학교에다 비싼 등록금 내며 전공

까지 하면서 배운 영어와 아이들 키워가며 일본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손짓발짓 써가며 먹고 입고 돌아다니며

일상생활 속에서 그것도 공짜로 배운 일본어는 분명 자신감에서부터 차이가 있었다. 앞으론 일본어로 하는

일이라면 못할 게 없어보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 웃기는 노릇이었지만 어디서 나왔는지 그런 무모한 용기

덕분에 귀국 후 대학원 일어교육과에도 진학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것저것 죄다 알았다면 무턱대고 도전을 하기는 쉽지 않았을 테다.


졸업 후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대학동창들은 지금도 내가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고 하면 영어를 가르칠 거라고 생각하는 친구들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똑같이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영어교사로 11년간이나 재직했으니 일본으로 건너 간 5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턱이 없는 친구들이므로.


아무튼 2001년 2월 일어교육과 대학원 석사를 마치고 그 이듬 해 3월 서울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다.

대학 강의라지만 좀 특별한 강의였다. 내가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한 1998년 당시는 일본어가 꽤 잘 나가던 시절이었다. 일본대중문화 개방이 시작되면서 일본 애니메이션, 비디오, 공연, 음반, 게임, 방송 등이 본격적으로 일본대중문화 봇물 터지듯 개방되고 확대되었다. 그러한 인기 여파로 고등학교 입시에서 제2외국어로 불어나 독어보다는 많은 학생들이 일어를 선택하거나 소수가 중국어를 선호하던 때였다. 일본어 인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다.


그러면서 일선 고등학교에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학생들이 대부분 일어를 선택하다보니 일어교과

과정이 늘어나면서 자연히 일어교사 수요가 많아지자 일어교사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가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러자 교육부에서 전례 없는 희한한 대책 하나를 내놓았다. 서울시내고등학교 불어교사와 독어교사를 대상으로 서울대학교에서 일본어교사특별양성과정 프로그램을 운영하였는데 이들 불어교사와 독어교사에게 1년간 일본어를 집중적으로 교육시키고 시험을 치르게 해 시험에 통과하는 선생님들을 일본어교사로 새로 발령하는 제도였다.

전례 없던 이런 급작스런 제도 탓에 기존 사범대학 일어교육과 교수와 학생들의 반발 내지 불만도 터져 나왔고, 단 1년간의 교육으로 과연 제대로 된 일본어 교사 양성이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 백년대계는커녕 땜빵식 교육제도라는 비판, 교육받는 당사자인 불어교사와 독어교사들의 자존감 상실 및 시대변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냉엄한 현실적 문제 등등 여러 목소리가 들끓었다.


그러나 이런저런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일본어교사특별양성과정은 교육부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불어선생님과 독어선생님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는 독특한 프로그램에 나도 일본어 강사로 참여하게 되었다.


막상 그들 앞에 서니 그 모든 것이 기우였다.

불어선생님과 독어선생님들은 생각한 것보다 더욱 절박하고 절절한 마음과 눈빛으로 열정을 쏟으며 일본어 공부에 매진하였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이어지는 강도 높은 수업에 날마다 갖은 시험을 치러가면서.


나는 만감이 교차했다. 나도 십여 년 전에는 영어교사였는데 지금은 일어를 가르치고 있다니, 그것도 나와

비슷한 연배의 현직 선생님들 앞에서…

정말 인생은 알 수 없는 일의 연속이며 좀처럼 생각대로 되어지지 않는 사건의 연속이다. 


우째 이런 일이…

오늘 이순간이 내게나 그들에게나 뜻밖의 고개를 오르는 과정이리라.

그들도 아마 나와 똑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정말 값지고 내 인생 최고의 일 년을 보낸 후 수료식 때 선생님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편지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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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는 세 가지 고개(坂)가 있다고 합니다.

오르막 고개(上り坂)와 내리막 고개(下り坂) 그리고 설마 하는 뜻밖의 고개(まさか?)가 그것입니다.

저는 일본어「마사카(まさか)」라는 단어를 우리말로 옮길 때에는 ‘설마’ 보다는 ‘우째 이런 일이… ’로 곧잘 번역하곤 합니다.


오르막 고개(上り坂)와 내리막 고개(下り坂)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늘 되풀이되는 그런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마사카(まさか)」라는 고개는 그리 흔한 고개가 아닙니다.

인생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하는 그 정도일 것입니다.

이「마사카(まさか)」라는 고개를 힘겹게 오르다보면 시야가 넓어져 풍요롭고 다양한 인생을 즐길 수도 있으며 새로운 낯선 길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기도 합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새로운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그만큼 인생의 묘미를 갑절로 만끽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선생님들의 일 년간의 일본어교육과정은 그야말로「마사카(まさか)」라는 고개를 땀 흘리며 묵묵히 걸어오신 시간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와 선생님들과의 인연 역시「마사카(まさか)」라는 고개가 없었다면 결코 만날 수 없었던 귀중하고 아름다운 순간들이었습니다.

함께 손잡고 지나 온「마사카(まさか)」라는 고개는 앞으로 선생님들의 인생에서 두고두고 값진 전기(転機)가 되리라 확신합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선생님들과 마주했던 소중한 시간들 정말로 즐거웠습니다.

2003년 2월7일 오경순.


2014.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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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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