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를 정확히 1991년에 처음 시작했으니 사계절이 바뀐 횟수만 세어도 올해로 스물여섯 번째다.
게다가 아예 일본에 주거지를 옮겨 먹고 자며 떠들며 일본인들 속에서 생활한 기간만도 약 6년 정도가 된다. 어디 이것뿐인가? 석사과정에서 일본어교육을 전공하고 일본어학 박사까지 했다. 또한 일본 무사시대학에서 객원연구원 생활도 꼬박 1년이나 했다. 게다가 대학에서 일본어 관련 강의를 한 경력도 올해로 17년째에 접어든다.
뒤돌아보면 1991년 이후 줄곧 일본어와 함께 호흡하고 생활하며 또 일본어 덕분에 먹고 살고 있다.
일본어 공부를 게을리 한 것도 아닌데… 때론 일본어 원서 한 권을 통째로 외우다시피 하며 번역까지 하면서 일본어를 손에 놓지 않고 사는 데도 일본어는 정말 어렵다.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어렵다.
일본어가 한국인들이 배우기 쉬운 언어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오죽하면 영어권 화자들에게 가장 배우기 어려운 언어 5가지를 꼽았을 때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가 나란히 들어갈까? 역시 한자가 문제는 문제인 듯하다.
한국어와 일본어는 언어 구조상 유사한 점도 많지만 차이점도 많다. 같은 한자 문화권이라는 커다란 공통점도 있으나 한 ․ 일 양 언어가 유사하다는 선입관 때문에 오히려 한국인 일본어 학습자들은 한 ․ 일 양 언어의 문법 구조와 어법, 화용적 특징, 관용어법, 맥락 등을 간과해버리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이러한 오류는 단지 일본어 습득뿐 아니라 애써 익힌 일본어를 실생활에 제대로 활용, 응용하며 진가를 발휘해야 할 중요한 순간에 빛을 잃기 일쑤다.
예를 들어 한국어로는 달랑 한 문장인 ‘봄이 왔다’라는 가장 기본적인 단문도 일본어로 표기하자면 여덟까지 이상이나 된다. 물론 ①번, ②번처럼 한자와 히라가나를 혼용하는 경우가 가장 일반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외 표현들이 일본어로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다.
① 春が来た。
② 春がきた。
③ はるが来た。
④ はるがきた。
⑤ 春がキタ。
⑥ ハルが来た。
⑦ ハルがきた。
⑧ ハルガキタ。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일본어의 큰 특징 중의 한 가지가 또 있다. ‘봄이 왔다’를 일본어로 말할 때 일본인이라면 십중팔구 ‘春が来た。(봄이 왔다)’보다는 ‘春になった。(봄이 되었다)’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요컨대 ‘春が来た。’보다는 ‘春になった。’가 훨씬 일본어다운 표현이라는 말이다. 우리말처럼 문장의 주어나 주체를 내세워 주어나 주체가 한 행위나 동작을 드러내기 보다는 피동형처럼 상황을 묘사하는 표현을 선호하는 것도 일본어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이다.
특히 일본어에는 ‘고토다마(言霊)’라 하여 말 속에 '혼‘이 깃들어 있다고들 한다.
예를 들면 일본어에 ‘호메고로시(褒め殺し)’란 말이 있다. 칭찬하다는 뜻의 ‘호메루’와 죽이다는 뜻의
‘고로스’를 합친 복합명사이다.
‘호메고로시’란 실제 이상으로 칭찬하여 상대를 불리한 상황에 빠지게 하거나 의욕을 잃게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호메고로시’가 상대를 치켜세우는 일인지 궁지로 몰아넣는 일인지 끝까지 들어보지 않고서는
진의를 파악할 수가 없다.
또한 일본어에 ‘도오리마(通り魔)’가 있는데 ‘만나는 사람에게 재해를 끼치고는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길거리 악마’라는 뜻이다. 소위 ‘묻지마 살인 사건’처럼 어느 순간 가해자에게 마(魔)가 끼어 사람을 해친다는 말인데 얼핏 보면 가해자나 피해자나 양쪽 모두 피해자처럼 취급하는 듯 하는 참으로 모호한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2008년 도쿄 아키하바라 대로에서 트럭을 몰고 불특정 다수 행인들을 치며 묻지마 살인을 저지른
일명 ‘아키하바라 도오리마’사건이 일어났을 때 일본사회 일각에서 ‘도오리마’라는 일본말 자체를 없애버려야 한다는 움직임도 일었다.
역시 한 가지 언어를 터득하려면 단지 언어 자체만의 시야에서 벗어나서 그 나라의 정치, 경제, 역사, 문화, 문학, 의식구조, 언어감각 등 그 언어를 둘러싼 배경지식이 없으면 그 언어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도 없고 전달할 수도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국인에게 일본어 습득이 어려운 요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리 한자음으로는 항상 똑 같이 한 가지로 발음하는 한자가 일본어에서는 음독이나 훈독 혹은 예외로 독특하게 읽는 등 일본 한자 읽기가 가장 까다롭고 어렵다고들 한다. 한 예로 한자 ‘生’은 우리 한자음으로는 ‘생’ 하나이지만, 일본 한자음으로 읽게 되면 수십 가지나 된다.
그런데 일본 한자 읽기가 일본인한테도 어려운 모양이다. 오죽하면 아소타로(麻生太郎) 전 일본 총리를
‘KY히토(人)’라 하며 비아냥거렸겠는가? 공식 석상에서 참모진들이 미리 작성해준 원고를 읽어내려 가면서도 한자를 종종 틀리게 읽는 아소타로 총리를 빗대어 ‘한자를 읽지 못하는 사람’ 이라는 일본어
‘漢字(Kanzi)が読めない(Yomenai)人’를 줄여서 ‘KY人(케이와이히토)’라며 깎아내렸다.
또한 복잡하고 다양한 일본어 경어체계 숙달도 만만치 않고 한국어로 번역이 불가능한 사동피동 표현 등
사동형과 피동형 표현이 많은 것도 한국인 학습자가 애를 먹는 요인 중 하나이다.
한국어와 일본어가 유사한 탓에 오히려 헷갈리며 자칫 틀리기 쉬운 표현 예를 하나 들어본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주고받는 기분 좋은 일본어 인사말 중에 이러한 표현이 있다.
あなたにお会いできて大変栄光です。(당신을 만나 뵙게 되어 대단히 영광입니다.)
그런데 이 일본어 문장은 옳은 표현일까?
우리말 ‘영광’에 해당하는 일본어는【栄光】가 아니라【光栄】이다.
일본어 전공자라 할지라도 일본어 작문이나 한일 번역을 할 때 자칫 오류를 범하기 쉬운
표현 중 한 가지이다.
인터넷 번역기에 넣어 봐도 우리말 ‘영광’에 해당하는 일본어는 영락없이【栄光】으로 번역되니 주의해야
한다.
또한 손윗사람을 만났을 때 자신을 낮추며 격식을 차린 다음 인사말도 마찬가지이다.
お目にかかれて光栄に存じます。(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러면 우리말 ‘영광’에 해당하는 일본어는 무조건【光栄】이고, 일본어에【栄光】이란 말은 아예 없을까?
한국인 일본어 학습자가 자주 오류를 범하는 함정이 바로 이 대목이다.
한국어로 ‘영광’과 ‘광영’은 모두 ‘아름답게 빛나는 영예’를 뜻하는 같은 말이다.
그러나 일본어에도【栄光】과【光栄】은 있으나 양쪽의 의미가 다르니 정확히 가려 써야 한다.
일본어【栄光】는 ‘커다란 명예(大きな名誉)’를 뜻한다. 즉 ‘난관을 극복하고 보통 사람들은 감당해 내기
어려운 일이나 임무를 끝까지 완수하고 이루어낸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예를 들어 ‘그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의 영광을 손에 넣었다. (彼はオリンピックで金メダルの栄光を手にいれた。)’ 의 경우처럼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도달하기 어려운 힘든 목표를 달성한 이러한 경우에 쓸 수 있는 적격인 일본어 표현이 바로【栄光】이다.
그러므로 극히 한정된 위와 같은 경우가 아니라면 한국어 ‘영광’과 ‘광영’에 해당하는 일본어는
【光栄】으로 염두하고 아래처럼 말하거나 쓰면 거의 틀림없다.
제가 만든 요리를 잡수셔서 영광입니다.
私の作った料理を食べてもらって光栄です。
일본어 문법을 착실하게 공부한 사람일수록 실수를 범하기 쉬운 일본어 표현 예를 한 가지 더 들어본다.
일본어 회화에서 많이 쓰는 표현 중 ‘거짓말하다【嘘をつく】와 거짓말마라【嘘をつけ】’ 가 있다.
그런데 일본어 ‘거짓말하다【嘘をつく】’의 명령형인【嘘をつけ】는 문법적으로 따지면 ‘거짓말해라’
라고 하는 정반대의 의미가 되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거짓말 마라! 혹은 거짓말쟁이’의 뜻으로 쓰인다.
왜 그럴까?
‘거짓말하다【嘘をつく】’ 의 금지를 나타내는 표현이 ‘거짓말 하지마라【嘘をつくな】’인데 강조하는
의미로【嘘をつけ】를 거짓말쟁이의 의미로 사용했고, 여기서【嘘をつけ】는 발화의 기능 중 명령의
기능이 아닌 상대를 비난하는 기능으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거짓말쟁이【嘘をつけ】’는 일본어 문법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지만, 일상생활에서 흔히
사용하는 표현이므로 일본어 학습자들은 특히 주의를 기울여 익힐 필요가 있다.
아무튼 한 ․ 일 양 언어의 유사성과 모어 간섭 탓에 한국인 일본어 학습자가 자칫 틀리기 쉽고 헷갈리기
쉬운 일본어 표현을 정리하자면 족히 책 몇 권은 될 듯싶다.
(2015.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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