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와 일본어는 미묘한 삼각관계(微妙な三角関係)

 

일본어 관련 책을 읽다보면 심심찮게 이런 말을 보게 된다.

“일본어를 공부하기에 한국인은 축복받았다”, “일본어도 쉽지만 일본인은 더 쉽다”, “일본어는 조금만 노력해도 잡힌다”, “워킹홀리데이 3개월로 일본어 완전정복”, “일본어 한 권으로 끝낼 수 있다”, 한국인이 가장 쉽게 배울 수 있는 외국어는 일본어” 등등.

만사 제쳐놓고 당장 저자에게 달려가 그 비법을 듣고 싶다.

 

수많은 탈모개선치료제가 나왔어도 여전히 탈모를 이겨 냈다는 신약이나 치료제는 못 들어봤듯… 25년 이상 거의 매일 일본어와 생활하며 일본어로 먹고 사는 나도 가끔은 이런 말에 혹할 때가 있다. 과연 그럴까? 한국인에게 일본어는 정말 쉬운 언어인가?

 

산케이 신문사 편집장을 거쳐 평론가로 활동하는 오노 도시아키(大野敏明)가 쓴 책『일본어와 한국어(日本語と韓国語)』를 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일본인들에게 한국어 공부는 ‘웃으며 들어가 웃으며 나온다(「笑って入って笑って出る」)’ 즉 도전해볼 만한 몇 안 되는 언어 중 하나란 얘기다. 중국어 공부는 ‘웃으며 들어가 울며 나온다(「笑って入って泣いて出る」)’. 요컨대 처음 시작은 재미있을지라도 하면 할수록 어렵다는 말이다. 그에 비해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공부는 ‘울며 들어가 웃으며 나온다(「泣いて入って笑って出る」)’. 처음엔 어렵더라도 어느 정도 지나면 쉬워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외국인들에게 일본어 공부란 ‘울며 들어가 울며 나온다’ 혹은 ‘울며 들어간 채 영영 못나올 수도 있다(「泣いて入って泣いて出る」あるいは「泣いて入ったきり出られない」)’.

일본인이 생각해봐도 외국인이 일본어 배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격하게 공감한다.

 

오노 도시아키(大野敏明)는 일본인들에게 한국어 공부는 ‘웃으며 들어가 웃으며 나온다’고 말한 한 가지 예로 한자를 들었다. 음독이나 훈독 혹은 예외로 독특하게 읽는 일본 한자와 달리 한국 한자는 1字 1音 원칙(한자 한 글자에 한 가지 음으로 발음)으로 훈독이 없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생(生)’이란 한자를 한국 한자로 읽으면 ‘생’ 하나로 끝나지만, 일본 한자의 경우 음독이 3가지, 훈독이 9가지, 음독도 훈독도 아닌 예외로 특별하게 읽는 경우가 무려 67가지나 된다. 혹은 그 이상일 수도 있다. 이렇다 보니 일본 한자 읽기가 일본인한테도 어려운 모양이다.

영미권 사람들에게 가장 배우기 어려운 언어 2위, 3위, 4위가 한자문화권인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가 싹쓸이 하는 것을 보면 역시 한자 탓일 게 분명하다.

 

한국어와 일본어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미묘한 삼각관계(微妙な三角関係)’라 답하리라.


‘미묘한 삼각관계’를 일본어로 발음하면 ‘비묘나산카쿠칸케(微妙な三角関係)’이다.

‘고속도로는 무료다’를 일본어로 발음하면 ‘고소쿠도로와무료다(高速道路は無料だ)’이다.

언뜻 들으면 거의 비슷하게 들리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다. ‘미묘한 삼각관계’라 하는 이유이다.

 

한국어와 일본어가 대체로 비슷하게 들리고 보이는 구석이 많다는 데 방점을 두느냐 혹은 비슷한 것 같아도 찬찬히 들여다보면 미묘한 차이가 있으므로 주의하지 않으면 낭패를 보기 쉽다는데 방점을 두느냐에 따라 갈린다고 본다. 전자에 방점을 두면 ‘일본어는 쉽다’할 것이고 후자에 방점을 두면 ‘일본어는 어렵다’할 것이다.

 

한국어와 일본어는 비슷한 구석이 참 많다. 맞는 말이다. 아예 발음이 거의 똑같은 말도 상당히 많다. 아래 한자들이 그렇다. 한국어인지 일본어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니 “일본어를 공부하기에 한국인은 축복받았다”라고 할 만하다. 이러한 예를 들자면 얼마든지 많다.


  한국어 / 일본어

  무리 /무리(無理)

  무시 / 무시(無視)

  온도 / 온도(温度)

  사기 / 사기(詐欺)

  분산 / 분산(分散)

  안심 / 안심(安心)

  가구 / 가구(家具)

  가치 / 가치(価値)

  간단 / 간탄(簡単)

  기운 / 기운(気運)

  분수 / 분수(分数)

  관리 / 간리(管理)

  난이도 / 난이도(難易度) 

  기분 / 기분(気分)

  요리 / 료리(料理)

  독서 / 도쿠쇼(読書)

  도덕 / 도토쿠(道徳)

  속도 / 소쿠도(速度)

  약속 / 야쿠소쿠(約束)

  계약 / 게야쿠(契約)

  의미 / 이미(意味)

  위치 / 이치(位置)

  교과서 / 교카쇼(教科書)

  감미료 / 간미료(甘味料)

  용이 / 요이(容易)

 

한국어와 일본어는 같은 한자 문화권에 속해있고 위에 열거한 예처럼 60% 이상 동일한 한자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이 한국어와 일본어가 배우기 쉽다고 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로 든다.

 

한편 한국과 일본에서 쓰는 동일한 한자인데도 의미가 전혀 다르거나 의미의 폭(語義, lexical meaning)에 차이가 있는 한자 또한 많다.

나는 이러한 한자들을 따로 모아 ‘가짜동족어(false friends)’라 부른다. ‘가짜동족어’는 일본어를 공부하는 한국인에게나 한국어를 공부하는 일본인에게 공통적으로 많은 오류와 오용 사례들로 나타나는데 이는 일종의 언어간섭 현상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가짜동족어’의 인식 부족은 일본어 담화구사 및 작문운용, 표현활용 면에서는 물론 일본어 번역작업 시에도 오용 및 오역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아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일본어는 어렵다고 단정 짓는 주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한자군인 ‘가짜동족어’다.

 

예를 들어,

‘영어를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갈지 영국으로 갈지 고민 중입니다.’를 일어로 말하거나 쓸 때 많은 한국인 일본어 학습자들은 ‘미국’을 ‘美国’으로 쓰기 쉽다.

그러나 일본어에 ‘美国’이라는 한자는 없다. 우리말 ’美国’에 해당하는 일본어는 ‘米国(베이코쿠)’ 또는 ‘アメリカ(아메리카)’로 써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美国’이라는 한자가 당연히 일본어에도 있으리라 착각하는 일종의 간섭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래처럼 써야 맞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갈지 영국으로 갈지 고민 중입니다.’

  英語を習うために、米国へ行くか英国へ行(い)くか悩んでいます。

 

‘저는 어렸을 때 별명이 많았습니다.’를 일어로 말하거나 작문할 때도 주의해야 한다.

‘別名’은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쓰는 한자다. 그러나 ‘닉네임(nick name)’을 뜻하는 한국 한자와는 뜻이 다르다. 일본에서 ‘別名’은 ‘異名’이다. 말 그대로 ‘본명 이외의 또 다른 이름’을 뜻한다. 한국어 ‘別名’에 해당하는 일본어는 ‘あだ名(아다나)’이다. 아래 문장 역시 이렇게 해야 맞다.

 

  ‘저는 어렸을 때 별명이 많았습니다.’

  私は子供の頃、あだ名がたくさんありました。

 

일본어 공부에 애를 먹이는 이러한 예 또한 상당히 많다.

우리는 ‘여자중학교’와 ‘여자고등학교’를 줄여서 ‘女中’, ‘女高’로 쓰지만, 일본어로 말할 때는 ‘女子中’, ‘女子高’로 해야 한다.

일본어에도 ‘女中’이라는 한자는 있으나 우리 한자와는 전혀 뜻이 다르다. 일본어 ‘女中’는 ‘하녀, 여자 종업원’, ‘도우미’ 등을 뜻하는 말이고, ‘女高’는 일본어에는 없는 한자다. 이 역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한자의 의미로 착각하여 속기 쉬운 한자다. 아래 문장도 이렇게 쓰고 말해야 맞다.

 

  ‘이 지역은 여중여고가 많습니다.’

  この地域は女子中女子高が多いです。

 

우리가 자주 쓰는 한자 ‘時間表’도 주의해야한다. ‘時間表’는 일본어로 ‘時間割’로 써야한다. 또 한 가지 일본어 전공자들도 종종 잘못 쓰는 예로 ‘평생회비(平生會費)’가 있다. ‘평생회비(平生會費)’를 일본어로 옮길 때 우리 한자 그대로 ‘平生會費’로 쓰는 경우가 많다. ‘일생’을 뜻하는 한국어 ‘平生’과는 달리 일본어 ‘平生’은 ‘평소’, ‘보통’의 뜻이다. 따라서 한국어 ‘平生會費’에 해당하는 일본어는 ‘終身会費(종신회비)’ 혹은 ‘生涯会費(생애회비)’로 써야 한다.

 

‘미묘한 삼각관계’ ‘비묘나산카쿠칸케(微妙な三角関係)’

‘고속도로는 무료다’ ‘고소쿠도로와무료다(高速道路は無料だ)’


세 사람의 남녀 사이가 얽히고설켰는데 삼각관계가 쉬이 해결될 리 만무다.

한국어와 일본어는 풀리지 않는 ‘미묘한 삼각관계’처럼 여전히 힘들고 머리가 아프다.

내가 한국어와 일본어를 ‘미묘한 삼각관계’라 하는 이유다.


일본어는 하면 할수록 정말 어렵다!


다시 한 번 되풀이하지만 오죽하면 오노 도시아키(大野敏明)라는 일본인조차 일본어 공부는 울면서 들어가서 울면서 나오기는커녕 영영 못나올 수 있다 했을까? 이 말을 위로로 받아들여야할지 격려로 받아들여야 할지…

(2017.10.21)

Posted by 오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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