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수 년 전 교육대학원 입학시험에 낙방했고 틀린 덕에 아직도 잊어버리지 않는 일본어가 하나 있다. 일본어 한자 ‘翻る’에 독음(讀音)을 다는 문제였다. 정답은 ‘히루가에루(ひるがえる)’이다.
‘히루가에루’의 뜻은 ‘뒤집히다’, ‘펄럭이다’ ‘바람에 날리다’이다.
그런데 내가 틀린 이 한자(翻る)는 훗날 박사과정에 진학해 ‘일한 번역’으로 학위를 받고
대학과 대학원에서 일한번역 강의를 하는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내 인생의 친숙한 키워드가 되었다.
가끔 학생들에게 퀴즈로 내본다. ‘翻る’ 정확한 독음은?
여태껏 맞춘 학생들이 거의 없었다.
생각해보면 그 옛날(?) 대학원입학시험 때도 한두 명 외에는 거의 다 못 맞췄던 문제였다.
아마도 떨어트리기 위해 낸 문제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PS: 혹 이 글을 읽고 입학시험 당시 이 문제를 기억하는 수험생 계시면 연락 한 번 주시길. 겸사겸사 옛 추억 떠올리며 진한 커피 한 잔 합시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7년 전의 시험문제를 생생히 기억하며 아직도 적극 활용하면서
이렇게 글도 쓰고 있으니 나와는 꽤 연(緣)이 있는 고마운 일본어임이 분명하다.
아무튼 이제는 내 생활의 일부가 된 ‘번역(飜譯)’을 한자어로 풀이하면 ‘飜(번)’은 ㉠날 번 ㉡나부낄 번 ㉢뒤집힐 번 ㉣옮길 번이며, ‘譯(역)’은 ㉠통변할 역 ㉡번역할 역 ㉢풀이할 역 ㉣ 나타낼 역이다.
종합하면 ‘번역(飜譯)’이란 ‘원문(source language)의 말이나 글을 뒤집어 번역문(target language)의 말이나 글로 옮겨 놓는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번역은 단지 말이나 글만 옮겨 놓는 행위가 아니다.
번역을 뜻하는 프랑스어 ‘traduction’ 와 영어 ‘translation’ 속에는 공간, 시간, 혹은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과 여행의 의미가 담겨있다.
두 경우 다 라틴어 동사 ‘traducere’에서 유래한 명사 ‘traductio’에 해당한다.
그렇다. 참 재미있고 묘한 일이다.
인생은 길고도 먼 여행길이라더니…
번역을 만나 친해지면서 내 인생도 완전히 바뀌었다.
또 다른 세상이 열리고 색다른 경험을 만끽하면서 몸은 좀 고달파도 마음은 늘 즐겁고 설렌다.
앞으로 번역이란 녀석이 또 어떤 여행길로 나를 유혹할는지 기대 반 설렘 반이다.
(2015.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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