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한(楽) 인생이 아닌 즐거운(楽しい) 인생을'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7.12.23 청춘, 열정과 변화로 살다

세상살이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세상은 내가 발로 뛰며 땀 흘린 만큼만 내 손에 들어온다.

내 의지로 선택한 지금 내 생활이 만족스럽다면 행복한 길을 가고 있는 거다.

나의 선택은 여태껏 내가 걸어온 과정의 축적이자 이런저런 혹독한 체험의 결과이다.

 

그저 편한 인생이 즐거운 인생은 아니다.

 

내 주위엔 크고 작은 불편과 어려움을 자초하면서도 자유롭고 즐겁게 사는 청춘들이 많다.

그들을 만나면 덩달아 신바람이 난다.

열정도 전염된다.

 

검정고시로 K대 법대에 들어와 학부 재학 중 치른 사법고시 2차 시험에서 불과 몇 점 차로 아쉽게 기회를 놓친 S양. 일본 아이돌 가수 아라시(嵐)를 좋아한 덕에 일본어에 취미를 붙여 일본어 공부에 올인하더니 지금은 일본어 강사와 법학공부를 병행하면서 일어일문학과 대학원까지 진학하였다. 그녀의 열정, 몰입감은 알아줘야 한다. S양의 내일이 기대된다.

 

두 군데 학부를 졸업한 K양. 영어와 일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보기 드문 어학 능력자라 할만하다. 일본어능력시험(JLPT) 만점이라는 기가 막힌 이력에 번역 능력도 출중하여 번역가의 길을 걷는가 했더니만 몇 달 만에 그 어렵다는 공항 출입국 관리직 공무원 시험에 턱 하니 합격하여 나타났다. 인천공항에서 근무 중이란다. 공항 나갈 일이 기다려진다.

 

사이버대학 온라인강의로 만났으나 J군과는 뭔가 통하는 게 있었나보다. 교내 특강이 있는 날이면 엄청 비가 쏟아지던 날에도 인천에서 득달같이 달려오더니, 아이 돌잔치 날에도 강의실 맨 앞자리에서 고개 내밀곤 하던 J군. 주경야독의 본을 제대로 보여준다. 아니나 다를까 올 겨울 일반대학원시험에 합격했단다. 세상에나 그것도 두 군데나. 세 아이 아빠로서 또 가장으로서 ‘아재력(力)’의 끝은 어디일지, J군의 배움의 열정, 종착역은 어디일지 벌써부터 흥미진진하다.

 

수년 전 세미나실 가득 메운 통번역대학원생 대상의 특강을 기분 좋게 마치고 여느 때처럼 Q&A 시간이었다. 맨 뒤에서 한 여학생이 손을 들었는데 손만 보이고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가장 뒤쪽이라 질문 내용이 잘 들리지 않자 그 학생은 세미나실 뒷문을 열고 복도를 지나 강의실 앞문을 열고 내 쪽으로 들어왔다. 휠체어를 탄 환한 미소가 인상적인 얼핏 보기에도 예의바른 학생 K양이었다. 지도교수 말로는 일본어 통역과 번역에 소질이 뛰어난데 휠체어 탓에 통역부스에 들어갈 수가 없어 번역을 전공한다고. 첫 질문자라는 사실도 박수 받아 마땅하지만, 한 시간 남짓한 강의를 들으러 부산서 KTX를 타고 왔단다. 그날은 추적추적 비까지 내려 그 멀리 부산에서 서울 신촌에 있는 캠퍼스까지 휠체어 통행이 여간 어렵지 않았을 텐데. 이럴 수가. 이런 감동이 또 없다. 어쩌다 문득 K양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 아니나 다를까 2013년 어엿한 번역가로 짠~하고 데뷔를 했다. 내게도 처녀작 번역서를 보내줘서 알았다. 감개무량하고 고맙다. 그날은 내가 K양에게 ‘인생 감동’ 특강을 들은 날이기도 하다.

 

K대 법대 대학원 계절학기 강의 중에 있었던 아직도 생생한 M군에 관한 에피소드 하나.

대학원 졸업시험에 필수인 제2외국어 시험이 있는데 70점 이상을 받아야 졸업자격이 주어진다. 내가 강의할 때는 독일어나 불어를 선택하는 학생들도 가끔 있었으나 대개 일본어나 중국어를 선택하는 학생들이 다수였다. 대학원 다니는 학교 교사나 직장인들도 수강하므로 수업은 저녁 6시 반부터 시작했던 것 같다. 졸업 필수과목이라 학생들 눈빛이 절절했다. 한창 수업 중이었다. 

M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강의실 뒤편으로 나가더니 양쪽을 왔다 갔다 서성댔다. 순간 내 수업에 불만이 있는 건가. 재미가 없어서인가 했다. M군의 행동에 신경이 안 쓰일 수 없는 터라 내가 살짝 물었다. “M군 수업이 지루하면 그냥 나가도 됩니다.” “교수님, 오늘 과제 제출하느라 날밤을 샜거든요. 일본어 공부는 재미있는데 너무 졸려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재간이 없어서 수업은 들어야겠고 해서 잠을 쫓느라 왔다 갔다 하면서 듣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 글을 쓰면서 M군을 검색해보니 변호사로 뜨는데 출신대학도 그렇고 아마 이 변호사가 M군이리라. 그 날 이후 학생들에게 강의 중 졸리면 강의실 뒤편으로 나가 왔다 갔다 하면 잠이 달아날 거라고 일러주며 어김없이 저작권자 M군 이야기도 곁들인다. 이렇게 내가 M군 이름을 들먹거리는 것을 M군이 알면 좋아할까. 싫어할까. M군은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이나 할는지.

 

꽤 오래 전 얘기다. 2001년 석사과정을 무난히 졸업하고 교양일본어 과목으로 학부 첫 강의를 K대에서 시작했다. 그 땐 큰 강의실이 몇 십 명씩 꽉꽉 들어찰 정도로 일본어 인기가 꽤 좋았을 때였다. 교양일본어라 타학과 학생들도 많았다. 가끔 수업시작하자마자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는 헌칠한 남학생이 있었다. 늦게 들어오더라도 늘 비어있는 맨 앞의 중앙 자리까지 와서 앉고 했다. 이따금 수업 중 졸 때도 있었지만 수업이 끝나면 칠판을 말끔하게 지우고 뒷정리까지 하고 내게 깍듯이 배꼽인사를 한 뒤 교실을 나갔다. 한 번은 착하고 기특한 마음에 커피 한 잔하며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아르바이트로 밤에 택시운전을 하고 있단다. 그 위험한 야밤 총알택시 알바라니… 집안이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래서 수업 중 졸아서 죄송하다며 연거푸 고개를 숙였다. 


그 후 종강도 하고 기억도 옅어져 가던 어느 날 Y군에게서 장문의 메일을 받았다. 가톨릭 사제의 길을 가겠노라고. 오래 전부터의 결심이라며 선생님께 꼭 말씀드리고 싶었다면서. 충고나 조언을 구하는 것이 아닌 속세와의 거리두기, 단절 통고였다. 20대 꿈 많고 호기심 많은 푸르디푸른 청춘이 이 세상 인연을 다 뒤로하고 떠난다니. 왜 그랬을까. 이유를 물어볼 수 없었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는 말조차 건넬 수 없었다.


그렇게 세상의 시시콜콜한 인연과 쿨하게 떠나간 뒤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Y군의 소식을 들었다. 독일 유학 온 지 5년이 넘었고 독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고. 꿋꿋이 사제의 길을 가겠노라고.

오랜 세월 끊어질듯 이어지며 만날듯 만나지 못하고 잊혀질듯 잊혀질 리 없는 Y군. 또 언제 상상 이상의 새로운 소식으로 나를 놀래킬는지. 먼 훗날 다시 만난다 해도 20대 청춘시절 Y군이 선택한 인생, 그 이유와 사연은 차마 다시 물을 수 없을 것 같다.

 

대개 우리는 아무런 제약이나 장애물이 없을 때 자유롭다고 느낄 듯싶으나 실은 구속과 통제의 틀 속에 있을 때 오히려 자유롭다, 요컨대 ‘자유로움의 역설’이다.

 

“나의 자유는 좁은 틀 안에서 내가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달려 있다. 내 행동 반경을 좁게 하면 할수록, 더 많은 장애물로 나를 에워쌀수록 나는 더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그 때 내 자유가 더 커지고 의미가 깊어진다. 나에게 더 많은 제약을 가할수록 내 영혼을 옭아매는 사슬로부터 더 자유로울 수 있다.”  『언어 사중주, p.255』

 

항상 새롭게 변화할 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는 말일 테다.

새로운 변화를 위해서는 일정 시간 고단함을 견뎌내고 지속적인 자기관리와 노력하는 자기제어가 필요하다.

 

그렇다. 진정한 자유란 변화를 꿈꾸는 이들처럼 자신의 꿈과 목표에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면서 느끼는 크고 작은 새로운 성취감이 아닐까.

 

인생은 꿈과 희망을 등에 지고 걸어가는 여행길이다.

 

결코 편한(楽) 인생이 아닌 즐거운(楽しい) 인생을 살아가는 아름다운 청춘들이다.

 

(2017.12.23)

 

-----------------------------------------

(註: 『언어 사중주』에서 김재준은 화가 이강소의 전시회 서문을 쓰면서 러시아 작곡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의 시학(The Poetics of Music)]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였다.  위 글은 김재준이 인용한 구절의 일부를 재인용한 글이다.)

Posted by 오경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