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에는 1월과 7월 일이 있어 일본에 두 번이나 다녀왔다.

 

1월 어느날 아침 우연히 TV를 켜니 아가와 사와코(阿川 佐和子) 씨가 진행하는《사와코의 아침(サワコの朝)》이란 아침 토크쇼 프로에 여배우 요시유키 가즈코(吉行 和子) 씨가 초대 손님으로 나왔다. 1935년생이니 현재 79세인 현역배우이다. 지금도 다양한 작품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쳐가는 팔팔한 시니어인 이른바 오팔족의 전형이라 할만하다.

 

오팔(OPAL)족이란 ‘활동적인 삶을 살고 있는 노인들(Old People with Active Life)’의 뜻으로 초(超)고령사회로 접어든 일본 사회에서 소비의 주역으로 떠오른 노년층을 지칭하는 일본에서 만들어진 신조어다.

 

사실 칠 팔 십대 오팔족 시니어 세대가 도전 정신으로 재무장하고 젊은이나 중장년층도 무색하리만큼 쌩쌩하게 현역활동을 이어가는 모습은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이젠 그다지 낯선 풍경이 아니다.

 

내가 이 프로에 눈을 떼지 못하고 감탄한 이유인즉슨 이 79세 여배우의 어머니가 현재 107세로 여전히 건강하며 오히려 79세 싱글인 딸의 일상을 걱정하며 늘 챙겨준다는 사실이었다.

 

바야흐로 인생백세 시대를 실감하는 요즈음이다.

 

장수(長壽)는 축복이자 리스크다.

오래 살게 되면 ‘얻는 것’도 있겠지만, 그 이상으로 ‘잃어버리는 것’도 많게 된다.

물질적으로 풍족하더라도 괴롭고, 부족하더라도 괴로운 것이 인생의 숙명이다.

 

현역 때는 일에 쫓기며 앞뒤 돌아볼 겨를 없이 살다, 정년 후의 인생설계, 취미활동, 노후 준비 하나 없이

어느 날 느닷없이 귀가한 남편들을 젖은 낙엽이 달라붙으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해 이른바 젖은 낙엽족’이라는 둥 아내만 졸졸 따라다닌다 해서 ‘아내 따라 삼만리족‘ 혹은 아내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에

‘아내 관심 구걸족’이라는 둥 안쓰럽고 딱한 신조어가 하루가 멀다 하고 등장한다.

 

남성들 입장에서는 심란하고 애처로운 이런 저런 비유가 아내 없인 혼자서는 자립도 어렵고 하루도 마음 편히 생활할 수도 없는 대다수 남성의 자화상이 아닌가 싶다.

 

우리 인생에는 세 가지 정년이 있다고 한다. 이름 하여 ‘고용 정년’ ‘일 정년’ ‘인생 정년’이다.

 

고용 정년이란 글자 그대로 다니던 직장에서 ‘이젠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최후통첩을 선고받는 타인이 정하는 정년’이다. 고용 정년은 누구에게나 온다. 조금 이르면 제 발로 나오게 되고 조금 늦으면 등 떠밀려 나오게 되어있다.

일 정년은 고용 정년과는 달리 자기가 자기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천직 혹은 천명으로 영어로 말하면 프로페션(profession)이 아닌 보케이션(vocation)에 해당한다. 소위 말하는 제2의 인생이다.

 

인생정년은 누구든 때가 되면 맞이하는 인생의 소풍을 끝내는 시간이리라.

 

엄청 무더웠던 7월 여름 도쿄에 갔을 때는 오랜 지인인 재일코리안 문상이 소개해줄 사람들이 있다면 내 손을 잡아끌었다. 문상이 사는 도쿄 나카노구 동네에서 시작한 작은 지역사회 봉사활동인 이른바 '야마토 나데시코 모임'이었다. ‘야마토 나데시코’란 일본 여성을 아름답게 칭하는 일본말이다.

우리말로는 ‘우아한 일본여성들의 모임’이라 할까.

 

일본은 세계 제1위 최장수 국가이며 인구 4명중 1명이 65세 이상인 노인천국이다.

평균수명은 여성은 약 87세, 남성은 약 81세로 홀로 남은 여성들이 당연히 많다.

 

그 날 모인 '야마토 나데시코' 회원 9명 중에서 최연소자는 68세, 최고령자는 99세로 그 외 평균 나이는 89세였다. 모두 홀로 남은 부인들이다. 혼자 적적하게 시간을 때우던 그들이 한 사람 두 사람 의기투합하여 집안에 방치됐던 오래된 일본전통예복인 ‘기모노’를 재단하고 바느질하여 손가방이나 도시락가방 등 생활소품들을 만들어냈다. 다른 건 몰라도 바느질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입소문이 나자 구매자가 줄을 잇고 예약주문을

받을 정도로 인기도 치솟았다.

 

예전에는 초저녁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요즘은 바느질에 재미를 붙이면서 쏟아지는 주문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온 몸과 마음을 쏟아 부었다. 판매 수익금은 지역 장애우 단체나 생활기반이 취약한 외국인단체에 기부한다고 한다. 세상에 나와 봉사활동을 시작하면서 지역사회에 기여한다는 자긍심도 생겨 삶의 활력을 되찾고

몸과 마음의 건강도 몰라보게 달라졌다. 무엇보다도 지루했던 하루하루가 새삼 즐겁고 행복해 살아있는 기쁨에 ‘원더풀 인생’이 절로 나온다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일 정년’인 제2의 멋진 인생을 살아가는 생생한 본이 아닐까 싶다.

 

 

<야마토 나데시코 모임,  2014.7.22 촬영>

 

 

 

<야마토 나데시코 모임,  2014.7.22 촬영>

 

 

 

 

<선물로 받은 기모노의 오비(허리띠)로 만든 손가방과 행주

 야마토 나데시코 회원 작품,  2014.7.22 촬영>

 

 

인생백세 시대를 자유롭고 충실하게 보내기 위해서는 ‘고용 정년’ 다음의 ‘일 정년’을 어떻게 자신만의 개성으로 디자인하느냐에 달렸다.

 

제2의 인생은 특급열차에서 완행열차로 갈아타며 새로운 인생을 마이페이스로 시작하는 시기이다.

 

중국에서는 노안을 화안(花眼)이라 한다고 한다. 꽃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연령이라는 뜻이다. 이 세상에는 꽃의 종류가 대단히 많지만, 꽃 하나하나의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음미할 수 있다는 것은 나이가 듦으로써 변하고 시들어 사라져가는 것, 즉 우리네 인생의 참다운 가치를 깨닫게 되는 소중한 연령이라는 말이다.

감동(感動)이란 글자그대로 ‘마음이 느껴져(感) 마음이 움직이는(動)’ 것이다. 세상과 인생에 대해 감동의

의미를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도 이때쯤이 아닌가 싶다.

 

정년은 끝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인생의 시작이다. 괴롭고 힘들었던 트레이닝 기간이 끝나고 가까스로 실전을 맞이할 수 있는 시기이다. 긴장을 늦추거나 우왕좌왕할 겨를이 없다.

누구든 한번은 젊고 한번은 늙는다. ‘이 나이에...’하며 어느 샌가 훌쩍 지나가 버린 진미(眞味)기간 운운한들 별 뾰족한 수가 없다.

 

과연 어떻게 인생에 탄력을 주는 새로운 신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겠는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나이든 이든 젊은이든 싱글이든 커플이든 누구든 한 번쯤은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을까?

소박한 마음으로 세상사는 것이 갈수록 녹록치 않다. 인생은 늘 어렵고 힘이 들지만, 그래도 힘이 들수록 우리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인생인지…이러한 문제에 자꾸자꾸 물음표를

던지게 된다.

 

어떻게 태어난 인생인데… 결국 인생의 본무대는 언제나 바로 지금부터 라는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2015.1.3)

 

 

 

Posted by 오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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