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다락(多事多樂)했던 5년간의 도쿄생활을 마무리하고 1996년 11월 서울행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

그 때 내 나이 서른여덟이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5년간의 외도였지만, 좀 건방지게 들릴는지 모르겠으나 귀국 당시 도쿄와 서울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분명 내가 느끼는 문화 온도 차가 존재했다.


우리 속담에 “정들면 고향”이라는 말이 있는데 일본어에도 그와 똑같은 “스메바 미야코(住めば都)”란 속담이 있다. 아무리 보잘 곳 없고 불편한 곳일지라도 살다보면 정이 들고 살기 편해지기 마련이다.

그 새 도쿄가 마치 내 고향처럼 정이 푹 들었던 모양이다.

뭐랄까 5년간의 공백 혹은 도쿄생활에 적응하느라 단련된 내 몸에 붙은 잔 근육들이 내 마음과 따로 노는 듯,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고 두문불출하는 날들이 오랫동안 이어지면서 마음 또한 무겁고 심란하기만 했다.


뭔가 일상의 새로운 변화가 절실했지만 탈출구는 그닥 보이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희망에 부풀어 낙관적인 자신감으로 가득 찼던 내일이 갑자기 의욕상실로 불투명해지면서 걱정과 두려움이 앞섰다.


그런데 인생은 타이밍이라 했던가. 인연이란 게 참 묘하다.


1979년 학부 때 수업을 들으면서 강의실에서 처음 만나게 된 영어학을 전공하신 박경자 선생님이 계신다. 여느 교수와 학생처럼 두 학기 수업을 들으면서 미국에서 갓 귀국하신 선생님의 싱그러운 젊은 시절의 수수한 모습과 성함 정도 기억하는 게 전부였다.


그 이듬해 1980년 대학을 졸업하고 11년간 고등학교 영어 교사로 근무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갔으니 졸업 후 근 십여 년 이상 박경자 선생님의 근황을 알 리가 없었다.


1980년대만 해도 적어도 내 주변은 다들 그랬다. 대학을 졸업하면 당연히 취직을 하고 부모에게서 독립을 해야지 대학원에 진학한다든가 유학을 간다든가 하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대부분 우리 같은 일반서민들은 취직 이외의 다양한 선택지를 고려해볼 생각조차 하질 못했다.

돌이켜 생각해봐도 그 땐 왜 그리 오로지 취직만을 염두해 두고 인생계획표를 그렸는지 이런 저런 꿈조차 아예 왜 없었는지 지금 생각해봐도 이해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일본 생활에 한창 익숙해질 무렵인 어느 날 박경자 선생님한테서 전화를 받았다. 와세다 대학에 교환교수로 나왔노라고.


그 당시 보기 드물게 내 친구 중 유일한 학구파 친구가 하나 있었다. 뒤늦게 엉덩이 무겁게 진중하게 앉아 공부에 재미를 붙이더니만 아예 학문의 길로 접어든 그 친구의 지도교수가 바로 박경자 선생님이었다. 마침 선생님께서 일본에 나가시게 되었는데 일본어를 전혀 못 하시니 혹시 하는 마음에 내 일본 연락처를 알려드렸단다.


그리하여 박경자 선생님과 도쿄 신주쿠(新宿)에서 15년 만에 뜻밖의 해후를 하였다.

외국에 잠깐이라도 살아본 사람들은 그 마음을 잘 안다. 사돈에 팔촌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어쩌다 외국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얼마나 반갑고 신나는 일인지를. 같은 한국 사람이라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적어도 1990년대 만해도 그 땐 그랬다.


박경자 선생님과 나는 15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하리만치 두세 번 정도 더 만남을 이어가면서 아주 편안하고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다. 가까운 나라이기는 하지만 아마도 일본이라는 외국이었기에 쉬이 정이 들었으리라.


내가 일본어를 좀 한다고 도쿄 이 곳 저 곳을 함께 구경도 다니고 선생님께서 병원을 가신다거나 일본어가 필요한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통역자원봉사를 자청하면서 선생님 덕분에 나도 덩달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기약된 시간은 더 빨리 다가오는 법. 선생님의 교환교수 임기 일 년은 그렇게 쏜살같이 지나가 버리고 마침내 선생님과는 아쉬운 작별을 했다. 선생님이나 나나 지금보다 이십여 년이나 더 풋풋하고 쌩쌩했던 그 때 그 시절 도쿄의 추억 사진 몇 장을 남기고 선생님은 다시 바쁜 캠퍼스 일상으로 복귀하셨다.

 

    

 

선생님께서 떠나가신 후 예전처럼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내가 그 이듬해 서울로 돌아온 후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고 점차 생활의 활력을 잃으며 몇 달간을 그저 허송세월을 하고 있을 때 이번에도 또 선생님께서 먼저 연락을 주셨다.


“내가 일본에 있을 때 선물 받은 책이 한 권 있는데 우리 나이에 읽으면 좋은 책이라던데…나는 일본말을 모르니 네가 읽어보고 무슨 내용인지 알려줄래?” 처음엔 선생님의 미션에 답하기 위해 열심히 읽기 시작했는데 읽다보니 내게도 공감 가는 내용이 많아 일본어 공부도할 겸 아예 노트에 한 줄 한 줄 써가며 번역을 하기로 했다. 말이 번역이지 지금 보면 거의 해석이나 다름없었지만.


어느 것 하나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고 무료하고 따분한 시간을 보내던 중에 난생 처음 해보는 번역작업은 내 일상을 활력모드로 되돌려놓는 계기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렇다. 인생은 꿈과 희망을 등에 지고 걸어가는 여행길이다.

내일이 기다려지는 설렘이 있고 무언가 몰입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축복인가.

하루하루 삶에 뚜렷한 목표가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힘이 솟아나는 기분 좋은 일상인가.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고 정식으로 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일본어 공부삼아 내가 하고 싶어서 번역하는 재미에 푹 빠져 시작한 책이 바로 소노 아야코(曽野綾子)의『계로록(戒老録)』이었다.


훗날 서투른 내 번역 원고를 보시고 이런 저런 우여곡절 끝에(이현기 교수님과 공역으로) 출판사에 다리를 놓아 주신 분도 다름 아닌 박경자 선생님이다. 이렇게 해서 나의 처녀작『100년의 인생, 또 다른 날들의 시작』은 1998년 영풍문고에서 출간되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박경자 선생님의 배려와 사랑이 없었더라면 감히 출판은 엄두조차 못 낼 일이었다.


소노 아야코(曽野綾子)의『계로록(戒老録)』번역을 처음부터 다시 손보고 새롭게 다듬어 2004년에 도서출판 리수에서 개정판으로 출간한 책이『나는 이렇게 나이들고 싶다』이다. 이 책은 근 십여 년 이상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내 대표작이기도 하다.


아무튼 나의 첫 번역서『100년의 인생, 또 다른 날들의 시작』을 분기점으로 제목처럼 내 인생에도 또 다른 날들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번역 책을 출간하면서 그와 동시에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일어전공 석사과정에 진학하였다. 대학원 입학도 전적으로 박경자 선생님의 진심어린 이 한 마디 격려말씀 덕분이었다. 

“일본에서 5년씩이나 살면서 애써 익힌 일본어가 아깝기도 하거니와… 내가 볼 땐 네가 일본어를 곧잘 하는 것 같기는 한데 이왕 배운 것 정식으로 대학원에 진학해 일본어 공부를 제대로 한 번 해보는 것도 좋을 듯싶은데…네 생각은 어떠니?”


일본에서 귀국 후 한 동안 마음을 잡지 못하며 허전함을 크게 느꼈던 것은 아마도 내 안에서 그만큼 많은 시도와 변화를 꿈꾸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생활 5년은 일본과 일본어, 일본인을 제대로 공부해 보고자하는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었고 나이 마흔 살에 대학원 석사과정 입학이라는 길고도 험난한 늦깎이 인생의 서막을 알리는 시작이었다.


우리는 스스로의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지만 주위 사람 도움 없이는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제대로 찾아 나아가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내게는 인생 고비 고비마다 등대 같은 존재였던 박경자 선생님의 과분한 인연 덕분에 지금 내가 여기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삶은 매순간 끝없이 갈라지고 이어지는 갈림길의 연속이다.

갈라지고 때론 이어지는 길목 길목마다 사소한 인연들이 숨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삶의 위로처럼 혹은 기적처럼.

우리의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크든 작든 눈에 보이지 않는 고마운 인연들로 가득 차있기 때문이리라.


(2015.4.15)

 

 

 


Posted by 오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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