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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4.07 행복이란 누군가가 늘 옆에 있는 것

유쾌한 첫 도전, 일본어 변론대회(辯論大會)

 

일본에 온 지 횟수로 2년째에 접어들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시간과 비례해 만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아이들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새로 만나는 일본인 엄마들, 또 동네 이웃이나 가끔 들르는 동네 라면집이나 소바가게 주인, 내가 사는 맨션의 집주인부터 관리인에 이르기까지 스스럼없이 대화를 주고받기에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구약소(区役所)에서 배우는 일본어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내가 말하고 듣고 전달해야하는 정보량을 커버할 수 있을 정도의 좀 더 수준 높은 일본어가 필요했고 이왕 일본에 온 이상 일본어 하나만큼은 제대로 하고 싶었다.

 

마침 우리 집에서 자전거로 5분 거리에 있는 그 당시엔 나름 꽤 규모도 갖춘 이스트웨스트 일본어학교(East West Japanese School)에 정식으로 등록을 마쳤다. 1993년 그 때만 해도 한국에서는 한창 일본어 붐이 일기 시작했고 그 영향에서인지 도쿄에는 한국인 유학생들이 참 많았다. 이스트웨스트 일본어학교는 일본대학이나 대학원 진학을 목표로 각 나라에서 유학 온 외국인 학생들이 일본 대학(원) 진학을 위해 입학 전 1년~2년 코스로 일본어뿐 아니라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을 이해하고 배울 수 있도록 다양한 커리큘럼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예상대로 학생들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듯한 이십대 초반이 대부분이었고 간혹 많아야 서른을 넘지 않은 듯 보이는 학생이 두어 명 정도였다. 우리 반은 스무 명, 거기서도 역시 내가 제일 나이가 많았다.


첫 시간 자기소개를 한 후 모두들 나를 언니, 누나로 불렀다. 오랜만에 들어본 호칭에 마냥 좋아하기에는 어쩐지 좀 어색하기도 했다. 수업은 오전 9시에 시작해 오후 2시에 끝났다. 하루 5시간씩 주 5일 강행군 수업이었다. 게다가 날마다 매 시간 수업 시작 전 전 날 배운 내용에 대해 시험도 봤다. 공부양도 많았지만 하루라도 예습 복습을 거르면 따라가기도 버거웠다. 매일 보는 시험과 중간시험, 기말시험 성적을 평가해 합격점을 통과해야 수료증이 나오고 이 수료증이 일본대학(원) 진학 시에 제출해야 하는 필수서류 중 한 가지라 했다.


사실 나야 대학 진학과 무관하니 이런 저런 시험에 그리 목을 매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만만치 않았던 수업료(그 당시 매월 6만 엔 정도)에 일단 일 년은 일본어에 죽기 살기로 매달려 보기로 작정한 이상 젊은 친구들과 똑같은 마음가짐으로 치열하게 부딪혀볼 수밖에 없었다.

일본어학교 등록 후 일상생활 중 가장 큰 변화는 아이들 위주였던 시간표를 내 위주로 다시 짜야했다.

여러 과목을 예습, 복습하고 날마다 치르는 시험공부도 하려면 우선 아이 둘을 가능한 한 일찍 재우고 공부할 시간을 확보하는 게 급선무였다.


특별한 일이 없는 경우는 저녁을 일찍 먹이고 늦어도 8시 반까지는 잠자리에 들게 했다. 그래야만 아이들이 잠 든 이후 시간은 일본어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일본어학교에서 5시간 수업에다 집에서 3시간 정도 하루 평균 8시간 정도 일본어 공부를 하면서 그 해 일 년간은 그야말로 일본어 공부에 올인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스트웨스트 일본어학교를 다닐 때 언어학습의 가장 기초가 되는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 일본어 공부를 가장 재미있게 열심히 하지 않았나 싶다. 생생한 일본문화 한 복판에서 일본인에 둘러싸여 일본 현지라는 최적의 환경에서 일본인 교사에게 일본어를 배우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지금으로부터 24년 전 1993년이니 말이다.


일본어 학교를 다니면서 당시 유치원 다니던 작은 아이의 대여섯 절친 엄마들에게 많은 신세를 졌다.

유치원 끝나는 시간이 일본어학교 수업 시간보다 훨씬 일러 유치원 끝나는 시간에 맞춰 아이를 데리러 갈 수가 없어 친구 엄마들에게 돌아가며 부탁하여 아이를 맡기곤 했다. 그 대신 일주일에 한번은 우리 집에 아이 친구들을 몽땅 데려와 마음껏 놀게 했다. 지금은 어엿한 청년이 된 료타로 군, 노부 군, 류이치 군, 야마다 군, 히로키 군, 마사토 군.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엄마들은 엄마들대로 지금도 이십여 년 이상 끈끈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일본어학교 하면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는 추억 하나가 있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 당시 그런 용기가 어디서 솟아나왔는지 통 알 수가 없다. 유학생 일본어 스피치대회에 나가 서른여섯 살 아줌마가 20대 유학생들 틈에서 우승을 하였다. 그런 대회가 있는 줄도 모랐지만 등 떠밀려 나가게 된 것은 순전히 일본어학교 모치쓰키 선생 덕분이었다.


나는 여태껏 그토록 열과 성을 다해 학생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진지하고도 자상하게 가르쳐주는 제대로 된 훌륭한 선생님을 만난 적이 없다. 땀을 뻘뻘 흘리며 목쉰 소리가 날 때까지 웃으면서 최선을 다해 알려주시던 모치쓰키 선생의 아름다운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1993년 10월 이스트웨스트 일본어학교 모치쓰키 선생 추천으로 미쓰비시 은행 국제재단이 주최한 제4회 유학생 변론대회(辯論大會)에 뭣도 모르고 참가하였다. 내가 준비한 변론대회 테마는 “일본의 수화 뉴스(日本の手話ニュース番組)”였다.


수화 뉴스는 NHK에서 매일 저녁 7시 50분에서 8시까지 10분 간 방송하였는데, 뉴스의 모든 내용이 자막으로 나오며 일본 한자마다 읽는 법까지 친절하게 덧붙여져 일본어 공부하기에 안성맞춤의 좋은 자료였다.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일본어 공부를 위해 늘 들으면서 공부한 터라 변론대회 주제를 정할 때 이것저것 망설일 것 없이 가장 먼저 떠오른 주제가 바로 “일본의 수화 뉴스(日本の手話ニュース番組)”였다.


아~ 그런데 이 게 무슨 일인가? 내가 우승을 하다니… 심사위원들 심사평 중 주제가 독특했다는 멘트가 한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게다가 참가자 중 가장 나이 많은 주부라는 이력도 동정심을 유발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일본에서 난생 처음 스피치대회 우승이라는 즐거운 경험을 하면서 부상으로 홋카이도 왕복 항공권도 받아 쥐고는 일본어 자신감도 그야말로 기세충천이었다. 최소한 스피치대회 우승 덕분에 홋카이도를 처음 여행하던 그 무렵까지는.

 

 

 

그 후로는 변론대회(辯論大會)하면 이스트웨스트 일본어학교 대표 주자로 은근히 나를 거론하는 분위기로 슬슬 바뀌었다. 그래서 내친 김에 그 해 12월 제9회 문부대신(文部大臣: 한국의 교육부장관) 장려 사단법인 일본우애청년협회(日本友愛靑年協會) 우애배쟁탈(友愛杯爭奪) 일본어 변론 전국대회에 다시 한 번 출전하게 되었다. 이 대회 변론 주제는 “내가 생각하는 자원봉사(私の考えるボランティア)”로 정했다.


그 당시 ‘토요스쿨(Saturday School)'이라는 나카노구(中野区)에 사는 일본인과 외국인 부모와 자식이 함께 참여하고 활동하는 소모임이 있었다. 일주일에 한번 토요일에 모여 자기 나라 문화를 소개하고 언어 공부도 하고 음식을 만들어 나눠먹거나 각국의 노래나 춤을 배우기도 했다. 또한 외국인으로 일본에 살면서 불편한 점이나 애로사항 등을 토로하며 도움을 청하기도 하며 자원봉사 활동도 겸했다. 요컨대 일본인 외국인 할 것 없이 상부상조하며 소통과 교감을 통해 함께 잘 살아가자는 작지만 의미 있는 독특한 지역모임이었다.


‘토요스쿨(Saturday School)'에는 눈이 안 보이거나 귀가 들리지 않거나 거동이 불편하여 휠체어를 타고 생활한다거나 몸의 이런 저런 부분이 불편한 장애아를 둔 일본인도 몇 분 참가하였다. 하루 종일 자신의 아이 돌보는 것만도 힘에 벅찰 텐데 이웃 장애아까지 하루 몇 시간씩 짬을 내 돌봐주는 자원봉사활동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 분들을 매주 만나 보고 듣고 느끼며 감동했던 순간들이 참 많았다. 그러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써 내려간 내용이 변론대회 주제가 된 “내가 생각하는 자원봉사”였다.


이 대회에서도 역시나 내가 제일 연장자였다. 결과는 참가상으로 끝났다. 일본인과 외국인이 동등하게 참가하는 예선전을 걸친 전국대회라 역시 쟁쟁한 참가자들이었다. 나보다도 더 많이 노력하고 더욱 절실한 참가자에게 우승이 돌아갔으리라 생각했다. 그렇다고 아주 쿨하게 전혀 아쉽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난 1993년 한 해 동안 내 생애 처음 일본어 변론대회에 두 번씩이나 도전을 했다. 남들이 볼 때 하찮고 별 볼일 없는 대회일지는 몰라도 일본어를 제대로 공부해보겠다고 마음먹은 지 일 년도 안 돼 그것도 일본에서 일본어로 일본인들과 나란히 경쟁을 펼치면서 얻어낸 자산 중 한 가지를 꼽으라면 값을 매길 수 없는 어마어마한 소중한 자신감이었다.

 

        

 

 

대회 당일 하루 종일 우리 작은 아이를 맡아주며 결과를 기다리던 절친 엄마들 또한 덩달아 분주하게 움직이며 케이크를 준비하는 등 축하파티를 계획했다고 한다.

“오이와이(お祝い:축하) 파티가 오시이(惜しい: 애석한) 파티”가 되었다면서도

“오상~ 스고이(すごい:대단하다). 스고이”를 연발했다.


진정 행복이란 늘 내 곁에 미소 짓는 그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이리라.

자신감 외에 일본인 친구들의 의리도 함께 빛난 그야말로 금상첨화의 행복한 시간이었다.

(2015.4.7)

Posted by 오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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