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렵든 쉽든, 중요하든 그렇지 않든 무슨 시험이든 한 번에 척하고 시원스레 붙어본 적이 거의 없다. 하다못해 자동차 운전면허시험 때도 그랬다. 그래도 운전면허시험은 그나마 나은 편으로 두 번째 시험에 합격증을 손에 쥐었다.


시험 징크스다.

시험 보기 전 날 꿈이라도 꾸게 되면 영락없이 시험 시간 내에 다 풀지 못하고 쩔쩔매다가 종이 울린다거나 불합격 명단 벽보에 떡 하니 내 이름 석 자가 붙어있기가 일쑤였다.

이런 시험 징크스는 지금 이 나이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


시험 징크스가 오랜 세월 반복되다 보니 알게 모르게 때론 약도 되고 비료도 된 듯하다.

합격, 불합격에 그다지 의미부여를 하지 않게 되었고, 점수나 등급으로 상대를 판단하고 재단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경박한 노릇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불합격자의 그 심정을 누구보다 더 잘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알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고 글로 쓸 수도 없다.

실제 부딪혀보고 수십 번 나가떨어지고 또 다시 일어서면서 오기와 맷집의 내성이 서서히 생겨나는 게 아닌가 싶다.

시간과 땀이 배어있지 않은 경험이나 인생이 아니고서는 상대를 이해할 수도 상대에게 감동을 줄 수도 없지 않은가?


1996년 11월 아쉬운 마음으로 도쿄 생활을 일단락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하루아침에 주변 환경과 생활패턴과 생활리듬 등 모든 것이 확 바뀌다보니 애들은 애들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적응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길지도 짧지도 않았던 5년 동안 그 새 서울 동작구 사당동의 겉으로 보이는 풍경도 많이 달라져 있었지만 안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더욱 낯선 풍경 천지였다.


작은 애는 일본 초등학교에서 사당동 초등학교로, 큰 애는 일본 중학교에서 근처 중학교로 편입했다.

일본서는 학교 끝나고 곧장 친구 집으로 달려가던 작은 애는 이튿날부터 같이 어울릴 친구하나 없고 놀만한 마땅히 데도 없었다. 큰 애 또한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티 내지 않고 눈치껏 적응하려 애쓰다보니 이런 저런 긴장감과 스트레스로 몸과 마음에 피곤함이 훤히 드러나는 나날이었다.


나는 또 나대로 두문불출하며 우두커니 지내는 날들이 많아졌고 해야 할 일이 많은데도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가족 모두에게 자칫 위기와 같았던 순간이었다.


이심전심이었을까?

내가 어떻게 지내는 지 궁금하다고 하시면서 염치없게도 박경자 선생님께서 또 먼저 연락을 주셨다.


“애써 익힌 일본어인데 대학원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일본어 공부를 해보는 것이 어떤지?”

“외국어를 잘 구사한다는 것은 단지 기능이나 기술일 뿐 학문하는 능력이나 실력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지나가는 말씀으로 하셨는데 순간 눈이 번쩍 뜨이며 여태껏 나를 짓누르고 있던 답답하고 무거웠던 마음이 싹 가시고 뭔가 뻥 뚫린 느낌이었다.


위기는 기회로 통한다 했던가.


눈앞에 벌어진 똑같은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난다.

인생이란 수없이 되풀이되는 실패와 시련을 극복하고 대처해가는 과정의 연속이다.

또한 그 숱한 과정 속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의 연속이다.


그런데 대학원 진학이 그 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1997년만 해도 대학원 입학 경쟁률이 어느 정도 높았다.

특히 김대중 정부 시절 추진한 일본대중문화개방을 일 년 앞두고 일본어와 일본문화 등 일본관련 부문에 과거 어느 때보다도 대중의 관심과 기대가 한층 고조되고 있던 때이기도 했다.


교육대학원 일어전공에 지원하고 시험을 치뤘다. 무슨 무모함으로 아무런 준비 없이 덜렁 대학원 입학시험을 봤는지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결과는 역시 보기 좋게 낙방이었다. 돌이켜보면 첫 시험에 낙방한 것이 얼마나 천만 다행인지.


학부에서 일본어를 전공하고 일선 중고등학교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는 현직 일본어교사들, 혹은 몇 년씩 입학시험을 준비한 젊은 친구들과 경쟁인데 너무 안일하고 무르게 대응했다. 학부 전공도 다른데다 졸업 후 한참을 다른 데서 기웃거리다 돌아와 게다가 적지 않은 나이 마흔에.


그제서야 “외국어를 잘 구사한다는 것은 단지 기능이나 기술이지 학문하는 능력이나 실력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라는 박경자 선생님 말씀이 이해가 됐다.


아무리 시험 징크스라 해도 무슨 시험이든 일단 고배를 마시면 의기소침해지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현실을 직시하고 주제파악을 할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시비를 가르고 잘못이 인정되면 얼른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남들보다 좀 빠른 편이다. 이것은 시험 징크스 덕분이다.


일주일 후 바로 석사과정에 재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한번 경험했으니 여러모로 준비는 수월했다. 기출문제도 구해다 보고 함께 시험 봤던 합격자들에게 연락해 공부 자료와 공부 방법 등 조언도 구했다. 그렇게 반년 동안을 거의 하루 종일 시험공부에 매달렸다.

드디어 합격이었다.


‘인생 백년 너무 늦은 시작이란 없다’를 되뇌며 슬로우 스타터(Slow Starter) 합류의 서막을 열었다.

교육대학원 과정 2년 반 동안에도 인생의 희로애락이 숨어 기다리고 있었다. 같은 꿈을 꾸며 같은 길을 가는 이들과 매주 만나고 호흡하며 대화하는 시간이 서로에게 얼마나 진지하고 절실했는지.


의미 있고 아름다운 최선의 선택이었던 석사과정은 딱 2년 반 만에 논문심사에 통과하면서 무사히 졸업하였다.


조금은 두터운 딱딱하고 까만 석사 논문 커버 뒷장 첫머리에 나는 이렇게 썼다.


기적처럼 한평생을 사시다 하늘나라로 가신 아버님의 영전에 이 책을 바칩니다.”

 

                     

 

 

내가 입학하고 일 년도 채 못 되던 1999년 7월 3일 향년 85세로 아버지는 인생의 마지막

 

긴 여행을 떠나셨다. 아주 평안하고도 고요하게 …

(2016.1.1)


 

 

 

 

 

 

 

 

Posted by 오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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