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시장'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5.01.10 공부의 힘, 아버지와 도시락
  2. 2015.01.10 아버지와 국제시장

내 아버지는 1914년생으로 고향은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꽃으로 유명한 평안북도 영변(寧邊)의 약산(藥山)이다.

아버지는 약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20대가 된 1940년대에는 먹고살기 위해 만주에서도 오지인 러시아 국경 쪽 헤이룽강 부근 건설현장에서 일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때였다. 건설현장에는 일본인 사장들과 중간 관리자인 한국인 반장들이 있었고, 그 외는 대부분 현장 노동일을 하는 중국인들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전쟁이 끝나면서 아버지가 일하던 건설현장도 쑥대밭이 되었다. 다급해진 일본인들은 자기들끼리만 몰래 따로 모여 도망을 갔고, 평소 현장에서 인심을 잃었던 한국인들은 중국인들에게 맞아죽기도 했다고 한다. 그 중 인심을 잃지 않고 성실했던 한국인들은 낮에는 중국인들이 숨겨주어 무사히 지내다 밤마다 걸어서 평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 당시 헤이룽강 건설현장에서 걸어서 평양에 도착하는 데에는 한 달 정도 걸렸다고 한다. 한 달 정도 밤길을 걷고 또 걸어 기적처럼 살아 돌아와 드디어 평양에 생활터전을 잡았다. 아버지가 31살 때 일이다. 사투를 벌이며 겨우 자리 잡아 가던 평양생활도 몇 년을 못 넘기고 또 다시 한국전쟁이 터졌다. 그야말로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1951년 무렵 일사후퇴 때 또 다시 맨몸으로 부모형제들과도 생이별을 하며 간신히 목숨 하나 부지한 채 살기 위해 남으로 남으로 부산까지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 때 아버지 나이는 서른일곱, 여전히 청춘이었지만

몸과 마음은 모든 것 다 잃고 망연자실한 무연고 노년의 무기력한 심정이었으리라.

 

그 고단하고 헛헛한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머니를 만나 일사후퇴 때 함께 남으로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 할 수 있을는지. 그 후 또 다시 이어지는 살아남기 위한 아버지의 모진 여정에는 쉼표가 없었다. 전국 각지를 다니며 안 해본 행상이 없을 정도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닥치는 대로 밤낮 없이 일했다.

 

그러다 드디어 정착한 곳이 서울 남산 아래 해방촌이란 동네였다.

해방촌은 8.15 해방과 함께 북쪽에서 넘어 온 사람들, 그리고 우리처럼 한국전쟁 때문에 남으로 피난 나온

사람들이 모여 정착하면서 그리 불렸다.

 

해방촌이 나의 고향이다. 나는 그곳에서 사남매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해방촌 아래 용산에는 미군부대가 있었는데 오며가며 미군들과 늘상 마주쳤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1960년대 중반 무렵에는 국제시장에도 등장하는 “헬로 기브 미 쪼꼬렛또”, “헬로우 기브 미 껌”하면서 미군들 뒤를 졸졸 쫓아다니면 미군들이

땅바닥에 던져주는 쪼꼬렛토와 껌을 주워 먹곤 했던 가난하고 슬픈 내 어린 시절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평소 아버지는 별로 말이 없었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공부하라는 소리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말수는 없었어도 늦둥이 막내딸을 바라보는 눈빛은 애잔했고 남달랐다.

왜 그렇지 않았겠는가. 느닷없이 피난인파에 떼밀려 고향산천을 떠나오면서 부모형제와 생이별을 하고 피붙이 하나 없는 낯선 남한 땅에서 궂은 고생 다해가며 간신히 남산 아래 발 뻗고 잘 수 있는 터전 하나 마련해 그렇게 가정을 꾸리고 마흔 훌쩍 넘어 얻은 막내딸인데. 살아생전 얼마나 더 볼 수 있으려나…하는 애달픈 마음에서였으리라.

 

내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생각하면 두고두고 가슴 찡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고3 때였다. 나는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수도여고를 다녔다. 1970년대는 대입 예비고사 제도가 있었고 예비고사 과외가 성행했던 때다. 친구들은 학교 수업이 끝나면 종로나 서울역 쪽 학원으로 향하거나 과외수업을 받으러 서둘러서 학교 문을 나섰다.

 

새삼 생각해보니 우리나라 교육열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단지 차이는 사교육비가 지금처럼 고액은 아니었던 것 같고 이런저런 난리통 속에서 좀처럼 배울 기회가 없었던 대다수 우리 부모세대는 단지 출세나 성공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식만큼은 제대로 가르쳐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다는 그 일념 하나로 버텨내며 자식들 뒷바라지에 온 마음을 쏟지 않았나 싶다.

 

나는 학원을 다닌 적도 없고 과외수업을 받은 적도 없다. 가정형편에 여유도 없었거니와 어떡하다보니 학교 성적도 그런대로 괜찮게 나오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내가 고3 때 이미 환갑이 지난 아버지와 어머니가 동네에 내세우는 유일한 자랑거리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막냉이(어머니는 막둥이를 이리 불렀다)는 학원도 안 다니고 과외 한 번 안 해도 잘만 한다우.”

그 당시 늙고 가난한 부모님의 이런 소박한 낙(樂)을 나 역시 웬만하면 오래도록 유효하게 유지하고픈 마음 또한 간절했다.

 

집과 학교는 지척 거리인지라 고3이 되자 나는 아무런 쓸데없는 무익하고 무모한 계획을 하나 세웠다. 수도여고 전교생 중에 제일 먼저 학교에 가고 가장 나중에 학교를 나서는 거였다. 부모님 말대로 ‘학원 한 번 안 다니고 과외 한 번 안 해도 잘만 하려면’ 무조건 남들보다 학교에 단1분이라도 더 오래남아 공부를 해야 한다고 각오를 다졌고 부모님의 자랑거리의 유효기간을 늘리기 위해선 이 방법 밖에 없다고 믿었다.

 

그러다보니 학교 문도 안 열린 어둑어둑한 새벽녘 수위아저씨가 오기를 기다린 적도 여러 번 있었고 자칭 수도여고 정문 개폐 관리 총책임자 역을 도맡아 했다. 날이 채 밝지 않은 새벽 어스름한 시간에 집을 나서 깜깜한 밤에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이를테면 잠자는 시간 외에 내 모든 일과는 학교 안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이때부터 아버지 어머니의 고3 막내딸 ‘도시락 배달 작전’이 개시되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온 종일 학교에 남아 있으려면 적어도 삼시세끼는 꼭 챙겨먹어야 했다. 전교생 중 가장 먼저 학교에 도착한다는 셀프약속을 지키려면 일어나자마나 일분일초라도 서둘러야 했다. 이른 새벽 집을 나서야 했기에 아침밥 먹을 시간도 없었고 도시락 싸주기를 기다릴 여유 따윈 전혀 없었다.

아버지 어머니는 연로하고 딱히 하는 일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집과 학교만을 오가는 고3 딸을 위해 뭔가 해주긴 해줘야 하겠는데 마땅한 일도 없는 듯 했다.

 

내가 새벽에 학교에 가고나면 어머니는 그 때부터 도시락을 싼다. 하루 세 번 매번 따끈따끈한 밥을 새로 지었다. 그 다음은 아버지가 나설 차례다. 그 도시락을 아버지가 들고 학교 정문 수위실로 어김없이 하루 세 번씩 배달했고 나는 수위실에 달려가 도시락을 찾아서 먹곤 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일 년 동안 세 번씩 정해진 시간에 도시락은 정확히 배달되었다.

 

도시락에 얽힌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한 번은 아버지가 도시락을 수위실에 맡기지 않고  한 창 수업 중인 우리 반 교실까지 직접 가져왔다. 공부를 하다 말고 어느 순간 친구들의 시선이 일제히 복도 쪽으로 쏠렸다. 보자기에 싼 도시락을 들고 복도를 서성이는 누추한 할아버지 모습이 얼핏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였다. 드디어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는 생각에 어떻게 수습해야할지 공부고 뭐고 좌불안석이었다.

 

나는 키가 작은 편이라 앞에서 두 번째 줄에 앉았는데 맨 뒷줄에 앉아있던 키 큰 친구가 살짝 뒷문을 열고 나가 도시락을 받아왔다. 그날 도시락은 특별 메뉴로 김밥이었다. 맨 뒷줄부터 도시락이 한 줄 한 줄 앞으로 전달되면서 약속이라도 한 듯 도시락 뚜껑이 한차례씩 열리고 김밥이 하나 둘씩 사라졌다.

진작 내 손에 도시락이 들어왔을 때는 달랑 네댓 개 밖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 사건을 계기로 그날 이후 ‘아버지의 도시락’은 고3 교실에 소문이 자자해지면서 입방아에 오르내리기도 하였다.

 

찬은 늘 소소하고 소박했지만 아버지의 도시락은 고비마다 꿋꿋하게 버텨낸 아버지의 강철처럼 단단하고

진한 세월의 무게가 배어있어 내겐 그 어떤 도시락보다 귀하고 화려한 선물과도 같았다.

 

내가 남들보다 한참 늦은 나이에 박사공부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누가 뭐래도 그 옛날 아버지 어머니가 만들고 날라다준 도시락 덕분이다. 그저 도시락이 아니다. 내 공부의 힘의 원천은 바로 아버지의 도시락이다. 연로한 부모님이 내게 해줄 수 있었던 최후의 사랑이었으며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유산이었다.

 

훗날 내 아이들도 내 나이가 되었을 때 평생을 두고 그리워하며 자랑스러워 할 삶의 나침판을 물려받았노라 추억할만한 유산을 물려줘야겠는데…이미 도시락 유산은 감히 흉내도 못 낼 테고…날로 쇠락하는 삶속에 또 하나 큰 짐이 더해진다.

(2015.1.10)

Posted by 오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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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제시장 흥행 뒷심이 무섭다.

15년 1월 10일자로 870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이대로라면 얼마 안 있어 천만도 뛰어넘을 기세다. (2017년 9월 11일 현재 국제시장 관람관객 총수는 천사백이십육만 명을 뛰어넘어 1위 명랑에 이어 역대 최다관객 동원  2위를 기록했다.)

 

물론 찬사와 혹평이 동시에 쏟아지며 설전도 오가며 여기저기서 논란도 불거지고 있다.

“영화는 영화로 봐주셨으면 한다”는 유제균 감독의 하소연이 무색하리만치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차와 정치적 이념 논쟁도 흥행에 톡톡히 한몫 거두는 듯하다.

 

나도 국제시장을 봤다. 그것도 혼자서 조조할인으로 봤다.

오전 10시인데도 빈자리가 별로 눈에 띄지 않았고, 주위를 둘러보니 관객들도 남녀노소 다양했다.

영화 국제시장의 관람 평이나 감상소감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국제시장뿐 아니라 어떤 영화든 연극이든 그에 대한 평이나 의견은 다양한 관객 수만큼 각양각색인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개개인의 역사와 인생사 및 가치관과 맞물려 확대 해석하며 볼 수도 있고 혹은 아무런 생각 없이 단지 좋아하는 배우의 연기에 몰입해 볼 수도 있다.

 

870만 관객 한 사람 한 사람의 어떠한 평가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왈가왈부 한다는 것은 그만큼 대중의 관심이 쏠릴 정도로 이슈화됐다는 흥미로움의 반증이니 좋고, 대립되는 분분한 의견들은 그래도 우리 사회에 거는 희망과 믿음이 숨 쉬고 있다는 증거니 그 역시 안심되어 좋다.

 

나는 영화 국제시장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봤다.

내게 국제시장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비디오테이프로 빠르게 되돌려 추억하는 ‘아버지의 인생 역정 다시보기’였다.

 

국제시장의 주인공은 덕수가 아닌 바로 내 아버지로 일사후퇴부터 남북이산가족찾기에 이르기까지 고비 고비 눈물과 한숨으로 얼룩진 일련의 사건들을 보고 있노라니 마치 아버지 일대기를 영화로 만들어 놓은 듯 했다. 영화 속에서 너나없이 가난했던 희미한 내 어린 시절 기억도 얼핏 스쳐지나갔다.

 

내 나이 대라면 구태여 영화를 보지 않더라도 짐작할만한 뻔한 줄거리에 중간 중간 군더더기 대사로 오히려 촌스러운 장면 연출도 더러 있었다.

먹고살기가 녹록치 않은 세상, 정신없이 살다보니 기억도 가물가물한 그 옛날 그리운 아버지를 회상하며 아버지의 삶을 다시보기 하면서 내 삶을 다지는 시간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무릇 책은 저자가 짓고 번역서는 역자가 번역하며 편집자가 다듬어 완성하지만 품질이나 가독성 등 최종 평가는 결국 독자의 몫이다.

마찬가지로 영화 국제시장의 최종 평가는 관객 한 사람 한 사람의 몫으로 돌리는 게 맞지 않을까.

(2015.1.10)

Posted by 오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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