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고개'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5.02.13 『35세를 위한 체크리스트』: ‘나의 35세' 인터뷰
  2. 2014.11.08 인생의 세 가지 고개

휴가를 뜻하는 프랑스어 ‘바캉스(vacance)’의 어원은 라틴어로 ‘빈자리’나 ‘공허함’을

뜻하는 ‘바누스(vanus)’ 혹은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지다’를 의미하는 ‘바카티오(vacatio)’

이다.

요컨대 반복되는 일상의 따분함과 텅 빈 마음에서 벗어나 새로운 내일을 살아가기 위해 인생에 활력, 신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는 진정한 자유(freedom)를 만끽하는 의미이리라.

 

우리 인생에도 굵직굵직한 큰 줄기의 ‘바캉스(vacance)’가 필요하다.

쉼 없이 시간에 떼밀려 살아오면서 지나쳐버린 길, 놓쳐버린 길에 미련과 후회와 아쉬움은

없는지 한번쯤 돌아다볼 인생의 휴가가 필요하다.

 

나 역시 가지 않은 길, 새로운 세상을 향해 모험과 도전을 강행하며 인생을 재충전했던

진정한 자유, ‘바캉스(vacance)’를 만끽한 시기가 정확히 내 나이 35세였다.

내 인생의 첫 번째 전환기였다.

 

 

 

 


                   『35세를 위한 체크리스트』:  ‘나의 35세' 인터뷰                                                    

     

‘뜻밖의 고개’가 인생을 풍요롭게 만든다

 

 

  학교를 졸업한다고 곧바로 취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간 어렵지 않다. 설령 직업을 얻었다 해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동료 혹은 선후배와도 치열한 자리싸움을 벌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소위 ‘철밥통’이라 불리는 공무원, 그중에서도 안정적이고 성취도도 높은 ‘선생님’이 된다면? 정년퇴임할 때까지 쭉 하는 게 인지상정이지 않을까. 하지만 오경순 교수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사실 운이 좋은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사범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하자마자 한 사립고등학교 선생님으로 부임한 것이다. 당시 스물세 살의 아가씨였던 그녀는 권위적이기 보다 친구 같은 선생님으로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활발한 성격에 붙임성 또한 좋은 편이었다. 학교 행사를 때마다 앞장서다 보니 동료 교사들의 사이도 돈독했다.

  20대 후반에 결혼을 했다. 평범하지만 순탄한 가정이었고 곧 두 명의 아이들이 태어났다.

화려하지 않아도 누구의 삶도 부럽지 않을 만큼 모든 것은 순조로웠다.

 

  하지만 오경순 교수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평화로운 일상 도중에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을 만큼 답답함이 몰려오곤 했었다.

  “교사가 된지 5년쯤 지났을 때 처음으로 직장에 대한 회의감을 느꼈어요. 학생들에게 매년

똑같은 것들을 가르치는 게 따분했어요. 학부에서 4년 동안 배운 내용으로 수십 년을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도 뭔가 부끄러웠죠. 그렇게 꾸역꾸역 버티고 있는데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애들 아빠가 회사에서 해외 파견근무를 제의받았거든요. 학창시절 영어를 배우는 재미가

쏠쏠해 영어선생님이 된 것처럼 그 시절로 돌아가 뭔가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싶었어요. 그 열망이 11년간의 교직생활을 정리하고 일본행을 택할 만큼 강했습니다.”

 

  1991년 늦가을 일본 도쿄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그녀는 “당시만 해도 일상생활에서 영어로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은 특별한 경우 외에는 매우 드문 일이라 하루빨리 일본어를 익히는 게 급선무였다”고 회상한다. 외국인거주자가 그리 많지 않던 시대였다. 뒤늦게 선택한 일본행이었고 나이가 있다 보니 배우는 속도가 좀처럼 오르지 않았다.

  각각 여섯 살과 세 살이던 아이들이 당장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다녀야 했기에 엄마로서도

하루빨리 언어를 습득해야만 했다. 아이들의 선생님과도 의사소통할 일이 생겼다.

또 일본에서는 부모가 아이의 유치원 등하교를 전담하기 때문에 같은 유치원에 다니는 자녀를 둔 엄마들과 함께 그 길을 오갔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반드시 일본어를 깨쳐야 했다.

 

  오전에는 지역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무료 일본어 교실을 다니고 오후에는 아이들이 가져온 연락장(선생님과 학부모 간 소통을 위한 알림장)을 공부삼아 서툰 일본어라도 선생님의 물음에 성심성의껏 답했다. 10년 넘게 학생들을 가르치다 직접 의자에 앉아 열심히 공부하다 보니 학생이 된 것 같아 마냥 즐거웠다.

  그렇게 1년이 지나자 일상생활을 하는데 불편함이 사라졌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욕심이 생겨났다. 그렇게 대학교 랭귀지스쿨에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엔 한국에서 유학 온 학생들을 따라가기 위해 치열하게 공부 했고, 그 사이 일본어 실력이 눈에 띄게 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의 순간이 찾아왔다.

 

  “학부시절 은사님이 와세다대 교환교수로 오셨는데, 일본에 사는 제 회화 실력이 학생들보다 조금 낫다고 생각하셨는지 통역을 부탁하셨죠. 하루는 교수님께서 책 한권을 주시며 번역을 맡기셨어요. 저를 좋게 봐주시는 것이 기뻤고 도전해보고 싶어 나름대로 열심히 번역했죠. 작업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신 교수님께 번역원고를 건네 드렸어요. 그러자 이번엔 책으로 내보자고’ 하시더라고요. 그 책이 제 첫 번역서 소노 아야코의『나는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였어요.”

 

  그녀의 서른다섯은 어땠을까?

  “사람들은 인생을 고개에 비유합니다.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다고들 말하죠. 하지만 늘 완만한 것은 아니에요. 살다 보면 ‘뜻밖의 고개’를 만나게 됩니다. 이 고개는 아무에게나 찾아오지 않습니다. 평소 관심이 있고 흥미로워하는 분야에서 만나게 되지요. 뜻밖의 고개를 경험할수록, 그리고 자주 만날수록 인생은 더욱 풍요로워 지는 겁니다.

  저의 뜻밖의 고개는 삼십대 중반이었습니다. 언어에 대한 동경으로 무턱대고 일본으로 떠난 시기였죠. 하지만 그게 시발점이 되어 옛 은사를 만났고, 그 인연으로 지금 이 순간까지 왔다고 생각해요. 다들 제가 무모하다고들 하지만 저는 후회하지 않아요. 이제 막 즐거운 인생 2막이 시작됐으니까요.”

 

  30대 중반부터 시작한 일본어. 일본인 틈바구니 속에서 직접 몸으로 부딪히고 배웠던 경험은 ‘일본어를 살아 숨 쉬는 언어로 제대로 번역해보고 싶다’는 소망으로 발전했다. 새로운 도전에는 그녀의 생각을 지지하는 든든한 지원자들이 버팁목이 되어 주었다.

  오경순 교수는 마흔 한 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고려대학교 일본어교육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그때까지도 교수를 해야겠다는 목표보다는 좋아하는 번역 좀 더 잘하고자 하는 바람이 컸었다. 그녀의 자신은 공부에 대한 열정과 성실함이었다.

 

  이 태도가 다시 한 번 빛을 발했다. 석사학위는 박사를 취득하기 위한 과정처럼 느껴졌고,

여기서 멈추면 큰 의미가 없다고 판단해 결국 박사과정까지 밟게 된다. 안정적인 교사직을

포기하고 매 순간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달려오면서 일본어에 발을 들여놓은 지 17년

만에 취득한 박사학위였다.

  지금 오경순 교수는 세종대학교에서 일어일문학을 가르치며 진실한 보람을 느끼고 있다.

고등학교 교사 시절처럼 입시준비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친자식 같은 학생들에게 앞으로의

인생을 위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위주로 강의한다. 학생들의 황금 같은 청춘을 허투루

보내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미래가 불안해 잠 못 이루는 젊은이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다.

  “우리는 꿈을 가져야 한다고 하면 반드시 무언가 이루어야 하는 것들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다 보니 꿈을 이루지 못했을 때 상대적으로 좌절감이 크게 다가옵니다. 우선 적당한 크기의 꿈을 가지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꿈이라는 게 성취의 유무에 따라 가치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꿈을 갖고 열심히 살았던 매 순간 순간들이 진정 가치 있는 삶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혹시 인생의 길목에서 찾아오는 작은 고개를 오르기가 힘들다면 주변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 함께 넘도록 해요. 도움을 준 이들을 꼭 기억하고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게 중요하지요. 언제고 상대가 도움이 필요할 때는 자신이 도움 받았듯이 되돌려 주면 되는 겁니다.

따로 또 같이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평소 인간관계에 소홀하지 말고 인연을

소중히 여기라고 당부하고 싶네요.”

 

(2015.2.13)

 

 

 

Posted by 오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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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기다리는 인생의 세 가지 고개(人生に待ちうける「まさか?」の坂 )

오르막 고개 ․ 내리막 고개 ․ 설마 하는 뜻밖의 고개

 

인생에는 세 가지 고개가 있다.

오르막 고개와 내리막 고개 그리고 설마 하는 뜻밖의 고개.


뜻밖의 고개라는 인생의 덤과 같은 행운은 어느 날 우연히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예기치 않은 모습으로 다가오는 거라고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나는 대학에서 영어교육을 전공했다. 대학을 졸업한 1980년 봄 5월부터 한 고등학교에서 길지도 짧지도 않은 11년간을 영어교사로 근무하였다. 그러다 느닷없이 1991년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떠났고 도쿄 히가시나카노(東中野)라는 아담하고 조용한 동네에 첫 보금자리를 마련하였다. 그 때만해도 히가시나카노에는 한국인이 별로 없었다. 여섯 살 큰딸아이와 세 살 작은아들 나 이렇게 세 명 모두 일본어는 깜깜 젬병이었다. 우리 집 네 식구 중 유일하게 일본어를 할 줄 알아 동네 슈퍼에서 먹고 사는 데에는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던 건 그나마 더듬더듬 거리더라도 돈 계산이 가능했던 남편의 알량한 일본어 덕분이었다. 돌이켜보면 그야말로 온 식구가 좌충우돌 천방지축 허둥지둥 대던 격동의 5년간이었지만 돌아갈 수만 있다면 다시 돌아가고 싶은 내 인생에서 최고조로 다이나믹하고 흥미진진했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희희낙락했던 좌충우돌 5년간의 일본 도쿄생활을 뒤로 하고 1996년 서울로 귀국하였는데 떠나기 전과 후

나나 우리 가족에게는 크고 작은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다. 내게 크게 달라진 점 한 가지를 꼽으라면 정식으로 학교에서 배운 게 아닌 난생 처음 살아본 타국 일본에서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 생활 속에서 백프로 일본사람 틈바구니 속에서 온 몸으로 익힌 생활일본어 능력?이 아닐까 한다.


그 땐 그랬다. 일본어 말하는 것 하나만큼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넘쳤다. 대학교에다 비싼 등록금 내며 전공

까지 하면서 배운 영어와 아이들 키워가며 일본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손짓발짓 써가며 먹고 입고 돌아다니며

일상생활 속에서 그것도 공짜로 배운 일본어는 분명 자신감에서부터 차이가 있었다. 앞으론 일본어로 하는

일이라면 못할 게 없어보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 웃기는 노릇이었지만 어디서 나왔는지 그런 무모한 용기

덕분에 귀국 후 대학원 일어교육과에도 진학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것저것 죄다 알았다면 무턱대고 도전을 하기는 쉽지 않았을 테다.


졸업 후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대학동창들은 지금도 내가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고 하면 영어를 가르칠 거라고 생각하는 친구들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똑같이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영어교사로 11년간이나 재직했으니 일본으로 건너 간 5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턱이 없는 친구들이므로.


아무튼 2001년 2월 일어교육과 대학원 석사를 마치고 그 이듬 해 3월 서울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다.

대학 강의라지만 좀 특별한 강의였다. 내가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한 1998년 당시는 일본어가 꽤 잘 나가던 시절이었다. 일본대중문화 개방이 시작되면서 일본 애니메이션, 비디오, 공연, 음반, 게임, 방송 등이 본격적으로 일본대중문화 봇물 터지듯 개방되고 확대되었다. 그러한 인기 여파로 고등학교 입시에서 제2외국어로 불어나 독어보다는 많은 학생들이 일어를 선택하거나 소수가 중국어를 선호하던 때였다. 일본어 인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다.


그러면서 일선 고등학교에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학생들이 대부분 일어를 선택하다보니 일어교과

과정이 늘어나면서 자연히 일어교사 수요가 많아지자 일어교사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가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러자 교육부에서 전례 없는 희한한 대책 하나를 내놓았다. 서울시내고등학교 불어교사와 독어교사를 대상으로 서울대학교에서 일본어교사특별양성과정 프로그램을 운영하였는데 이들 불어교사와 독어교사에게 1년간 일본어를 집중적으로 교육시키고 시험을 치르게 해 시험에 통과하는 선생님들을 일본어교사로 새로 발령하는 제도였다.

전례 없던 이런 급작스런 제도 탓에 기존 사범대학 일어교육과 교수와 학생들의 반발 내지 불만도 터져 나왔고, 단 1년간의 교육으로 과연 제대로 된 일본어 교사 양성이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 백년대계는커녕 땜빵식 교육제도라는 비판, 교육받는 당사자인 불어교사와 독어교사들의 자존감 상실 및 시대변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냉엄한 현실적 문제 등등 여러 목소리가 들끓었다.


그러나 이런저런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일본어교사특별양성과정은 교육부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불어선생님과 독어선생님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는 독특한 프로그램에 나도 일본어 강사로 참여하게 되었다.


막상 그들 앞에 서니 그 모든 것이 기우였다.

불어선생님과 독어선생님들은 생각한 것보다 더욱 절박하고 절절한 마음과 눈빛으로 열정을 쏟으며 일본어 공부에 매진하였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이어지는 강도 높은 수업에 날마다 갖은 시험을 치러가면서.


나는 만감이 교차했다. 나도 십여 년 전에는 영어교사였는데 지금은 일어를 가르치고 있다니, 그것도 나와

비슷한 연배의 현직 선생님들 앞에서…

정말 인생은 알 수 없는 일의 연속이며 좀처럼 생각대로 되어지지 않는 사건의 연속이다. 


우째 이런 일이…

오늘 이순간이 내게나 그들에게나 뜻밖의 고개를 오르는 과정이리라.

그들도 아마 나와 똑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정말 값지고 내 인생 최고의 일 년을 보낸 후 수료식 때 선생님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편지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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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는 세 가지 고개(坂)가 있다고 합니다.

오르막 고개(上り坂)와 내리막 고개(下り坂) 그리고 설마 하는 뜻밖의 고개(まさか?)가 그것입니다.

저는 일본어「마사카(まさか)」라는 단어를 우리말로 옮길 때에는 ‘설마’ 보다는 ‘우째 이런 일이… ’로 곧잘 번역하곤 합니다.


오르막 고개(上り坂)와 내리막 고개(下り坂)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늘 되풀이되는 그런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마사카(まさか)」라는 고개는 그리 흔한 고개가 아닙니다.

인생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하는 그 정도일 것입니다.

이「마사카(まさか)」라는 고개를 힘겹게 오르다보면 시야가 넓어져 풍요롭고 다양한 인생을 즐길 수도 있으며 새로운 낯선 길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기도 합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새로운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그만큼 인생의 묘미를 갑절로 만끽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선생님들의 일 년간의 일본어교육과정은 그야말로「마사카(まさか)」라는 고개를 땀 흘리며 묵묵히 걸어오신 시간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와 선생님들과의 인연 역시「마사카(まさか)」라는 고개가 없었다면 결코 만날 수 없었던 귀중하고 아름다운 순간들이었습니다.

함께 손잡고 지나 온「마사카(まさか)」라는 고개는 앞으로 선생님들의 인생에서 두고두고 값진 전기(転機)가 되리라 확신합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선생님들과 마주했던 소중한 시간들 정말로 즐거웠습니다.

2003년 2월7일 오경순.


2014.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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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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