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모님은 이북 출신으로 일사후퇴 때 남한으로 내려오셨다. 아버지 고향은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꽃으로 유명한 평안북도 영변(寧邊)의 약산(藥山)이고 어머니 고향은 마찬가지로 평안북도 신의주이다.

일사후퇴 때 남한으로 내려오실 당시 아버지는 서른일곱, 어머니는 서른셋의 푸릇푸릇한 청춘이었다.


나는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꽃에 나오는 “영변에 약산 진달래 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를 국어책에서 처음 접했을 때는 그런가보다 하고 별 감흥은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약주를 드시곤 어쩌다 한번 씩 영변의 약산 고향 얘기를 꺼내실 때부터는 진달래꽃이 지천에 흐드러진 영변의 약산이 더 이상 그저 국어책에나 있는 그런 영변의 약산이 아니었다.

강산에의 노래처럼 아버지 어머니가 죽기 전에 꼭 한번 만이라도 가보았으면 여한이 없겠다고 간절히 원하셨던 그러나 끝내 가보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갈 수밖에 없었던 진달래꽃 검붉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회한의 약산이 되어버렸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사후퇴 때 허둥지둥 맨몸뚱이 하나로 빠져나오느라 부모형제들과도 생이별을 하고 간신히 목숨 하나 부지한 채 살기 위해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셨다. 그 이후론 부모님의 생사도 그렇고 이북에 두고 온 형제들의 생사도 도통 알 길이 없었다. 그러다가 일사후퇴 때 부산까지 피난 내려갔었는데 거기서 오다가다 내게는 유일한 이모인 어머니 동생을 우연히 만났다고 한다. 어머니는 세 자매였으니 어머니의 큰언니는 그 후 그렇게 영영 행방불명자가 되어버렸다.


아버지도 삼형제였는데 휴전이 되고 난 후 어떻게 물어물어 수소문 끝에 바로 아래 동생은 찾을 수 있었지만 아버지 바로 위 큰형님은 결국 살아생전엔 만날 수 없었고 그렇게 이 세상에서의 간절한 삼형제의 해후는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래서 내 어렸을 때 친척이라곤 이모 한 분, 작은아버지 한 분 이렇게 달랑 두 분뿐이었다.

나는 지금도 이북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해방촌에서 가까운 용산동에서 사남매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요즘이야 여러 가지가 좋아져서 오십 전 후에도 출산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내가 태어날 당시만 해도 마흔이 넘어 애를 낳는 경우는 여간해선 드물었다 한다. 아버지 어머니 두 분 다 마흔을 훌쩍 넘겨 나를 낳았으니 가진 것 하나 없어도 늦둥이 막내딸에 쏟은 남다른 애달픈 사랑을 나는 두고두고 잊지 못한다.


나는 1970년대 중반 우리집에서 엎드리면 코 닿을 데에 있는 수도여고를 다녔는데 당시는 각 중학교․ 고등학교마다 자율적으로 조직된 ‘새마을어머니회’라는 학부모 모임이 있었다. 다달이 어머니들이 학교에 와 회의를 하곤 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우리집은 학교가 가깝다보니 학교에서 벌어지는 행사나 모임 등을 쉽게 전해 듣거나 알 수 있었는데 어머니가 어디서 알아냈는지 내가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는데도 ‘새마을어머니회’ 건으로 나몰래 학교에 오게 되는 날이면 친구들은 내게 “경순아 니네 할머니 오셨다.”고 할 정도였다.

그 당시는 내 친구들 엄마보다 훨씬 늙고 가난한 어머니 모습을 웬만하면 꼭꼭 숨기고 싶었는데 가진 것 하나 없는 늙고 초라한 어머니가 막내딸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이 그것뿐이었음을 내 가난한 마음 탓에 그 땐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버지는 평생토록 아주 건강하셨다. 팔십 육세에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 흔한 건강검진 한번, 입원 한번 한 적이 없었다. 말년에 어머니가 치매로 십여 년간 투병할 때 곁에서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하시다 결국 진이 다 빠져 어머니보다 먼저 떠나가셨지만. 어머니 병구완만 아니었다면 아버지는 아마 100세까지도 끄떡없지 않았을까 싶다.


아버지는 일사후퇴 때 남한으로 피난 나와 기적처럼 상봉한 열세 살 터울의 동생과 우애가 남달랐다. 일흔 줄에 들어섰을 때도 아버지는 여전히 건강했지만 한참 아래 동생은 풍기가 생기며 걸음걸이도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속이 타들어가며 한숨이 깊어져만 갔다.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삼십 여 년 전쯤으로 1980년대 중반이었을 게다.

1980년대만 해도 우리같은 서민들은 생활 물품도 귀하고 특히 커피나 양주 등 외국산 물건은 구하기도 어려워 웃돈주고 사곤 했던 시절로 기억하고 있다.


그 때는 왜 그랬는지 병명과 상관없이 우황청심환이나 구심(求心)을 만병통치약인양 구해서 먹고들 하였다. 그러다보니 우황청심환은 시중에 가짜도 많이 나돌아 중국산 진짜를 구하기 위해 중국을 다녀온 사람들이나 중국상들에게 비싸게 사서는 여차할 때를 대비해 가정상비약처럼 비축해두기까지 했다.


아버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버지가 만병통치약으로 감쪽같이 믿고 있는 진짜 우황청심환을 간절하게 구한다는 소문이 동네에 자자하자 아예 중국에서 직접 공수했다며 우황청심환을 정기적으로 대주는 브로커까지 등장했다.

아버지는 허투루 쓰지 않고 한 푼 두 푼 아껴가며 모은 적지 않은 돈을 브로커에 지불하며 동생에게 줄 우황청심환을 열심히 사서 모았다.

“우리 영근이가 이 우황청심환을 먹으면 곧 걷게 될 거야.” “이 약 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나니까 구하지 돈 주고도 못 구한다구”하면서 말이다.


나는 곁에서 지켜보면서 아버지가 터무니없는 돈을 지불하며 사들이는 우황청심환이 진짜일리도 없고 약효가 있을 리 만무하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눈치 챘지만 아버지에게는 끝내 말하지 못했다.


유식한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아버지가 동생에게 사주는 우황청심환은 가짜약일지라도 진짜보다도 더 강력한 플라세보 효과(僞藥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반드시 병세가 호전될 거라는 간절한 믿음을 가졌던 아버지에게나 작은아버지에게 우황청심환은 두 사람의 우애와 정성과 소망이 더해져 반드시 실현되고야 만다는 자기체면에 빠지게 만드는 그야말로 만병통치약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나 작은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에 안 계시지만 요즘처럼 생각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에는 아버지가 그 옛날 우황청심환에 걸었던 주문처럼 플라세보 효과일망정 잘될 거라는 자기주문을 걸게 된다.

나도 아버지처럼 정성을 다하고 간절히 소망하면 어떠한 꿈과 소망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다.

(2014.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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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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