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를 뜻하는 프랑스어 ‘바캉스(vacance)’의 어원은 라틴어로 ‘빈자리’나 ‘공허함’을

뜻하는 ‘바누스(vanus)’ 혹은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지다’를 의미하는 ‘바카티오(vacatio)’

이다.

요컨대 반복되는 일상의 따분함과 텅 빈 마음에서 벗어나 새로운 내일을 살아가기 위해 인생에 활력, 신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는 진정한 자유(freedom)를 만끽하는 의미이리라.

 

우리 인생에도 굵직굵직한 큰 줄기의 ‘바캉스(vacance)’가 필요하다.

쉼 없이 시간에 떼밀려 살아오면서 지나쳐버린 길, 놓쳐버린 길에 미련과 후회와 아쉬움은

없는지 한번쯤 돌아다볼 인생의 휴가가 필요하다.

 

나 역시 가지 않은 길, 새로운 세상을 향해 모험과 도전을 강행하며 인생을 재충전했던

진정한 자유, ‘바캉스(vacance)’를 만끽한 시기가 정확히 내 나이 35세였다.

내 인생의 첫 번째 전환기였다.

 

 

 

 


                   『35세를 위한 체크리스트』:  ‘나의 35세' 인터뷰                                                    

     

‘뜻밖의 고개’가 인생을 풍요롭게 만든다

 

 

  학교를 졸업한다고 곧바로 취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간 어렵지 않다. 설령 직업을 얻었다 해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동료 혹은 선후배와도 치열한 자리싸움을 벌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소위 ‘철밥통’이라 불리는 공무원, 그중에서도 안정적이고 성취도도 높은 ‘선생님’이 된다면? 정년퇴임할 때까지 쭉 하는 게 인지상정이지 않을까. 하지만 오경순 교수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사실 운이 좋은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사범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하자마자 한 사립고등학교 선생님으로 부임한 것이다. 당시 스물세 살의 아가씨였던 그녀는 권위적이기 보다 친구 같은 선생님으로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활발한 성격에 붙임성 또한 좋은 편이었다. 학교 행사를 때마다 앞장서다 보니 동료 교사들의 사이도 돈독했다.

  20대 후반에 결혼을 했다. 평범하지만 순탄한 가정이었고 곧 두 명의 아이들이 태어났다.

화려하지 않아도 누구의 삶도 부럽지 않을 만큼 모든 것은 순조로웠다.

 

  하지만 오경순 교수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평화로운 일상 도중에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을 만큼 답답함이 몰려오곤 했었다.

  “교사가 된지 5년쯤 지났을 때 처음으로 직장에 대한 회의감을 느꼈어요. 학생들에게 매년

똑같은 것들을 가르치는 게 따분했어요. 학부에서 4년 동안 배운 내용으로 수십 년을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도 뭔가 부끄러웠죠. 그렇게 꾸역꾸역 버티고 있는데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애들 아빠가 회사에서 해외 파견근무를 제의받았거든요. 학창시절 영어를 배우는 재미가

쏠쏠해 영어선생님이 된 것처럼 그 시절로 돌아가 뭔가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싶었어요. 그 열망이 11년간의 교직생활을 정리하고 일본행을 택할 만큼 강했습니다.”

 

  1991년 늦가을 일본 도쿄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그녀는 “당시만 해도 일상생활에서 영어로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은 특별한 경우 외에는 매우 드문 일이라 하루빨리 일본어를 익히는 게 급선무였다”고 회상한다. 외국인거주자가 그리 많지 않던 시대였다. 뒤늦게 선택한 일본행이었고 나이가 있다 보니 배우는 속도가 좀처럼 오르지 않았다.

  각각 여섯 살과 세 살이던 아이들이 당장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다녀야 했기에 엄마로서도

하루빨리 언어를 습득해야만 했다. 아이들의 선생님과도 의사소통할 일이 생겼다.

또 일본에서는 부모가 아이의 유치원 등하교를 전담하기 때문에 같은 유치원에 다니는 자녀를 둔 엄마들과 함께 그 길을 오갔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반드시 일본어를 깨쳐야 했다.

 

  오전에는 지역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무료 일본어 교실을 다니고 오후에는 아이들이 가져온 연락장(선생님과 학부모 간 소통을 위한 알림장)을 공부삼아 서툰 일본어라도 선생님의 물음에 성심성의껏 답했다. 10년 넘게 학생들을 가르치다 직접 의자에 앉아 열심히 공부하다 보니 학생이 된 것 같아 마냥 즐거웠다.

  그렇게 1년이 지나자 일상생활을 하는데 불편함이 사라졌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욕심이 생겨났다. 그렇게 대학교 랭귀지스쿨에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엔 한국에서 유학 온 학생들을 따라가기 위해 치열하게 공부 했고, 그 사이 일본어 실력이 눈에 띄게 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의 순간이 찾아왔다.

 

  “학부시절 은사님이 와세다대 교환교수로 오셨는데, 일본에 사는 제 회화 실력이 학생들보다 조금 낫다고 생각하셨는지 통역을 부탁하셨죠. 하루는 교수님께서 책 한권을 주시며 번역을 맡기셨어요. 저를 좋게 봐주시는 것이 기뻤고 도전해보고 싶어 나름대로 열심히 번역했죠. 작업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신 교수님께 번역원고를 건네 드렸어요. 그러자 이번엔 책으로 내보자고’ 하시더라고요. 그 책이 제 첫 번역서 소노 아야코의『나는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였어요.”

 

  그녀의 서른다섯은 어땠을까?

  “사람들은 인생을 고개에 비유합니다.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다고들 말하죠. 하지만 늘 완만한 것은 아니에요. 살다 보면 ‘뜻밖의 고개’를 만나게 됩니다. 이 고개는 아무에게나 찾아오지 않습니다. 평소 관심이 있고 흥미로워하는 분야에서 만나게 되지요. 뜻밖의 고개를 경험할수록, 그리고 자주 만날수록 인생은 더욱 풍요로워 지는 겁니다.

  저의 뜻밖의 고개는 삼십대 중반이었습니다. 언어에 대한 동경으로 무턱대고 일본으로 떠난 시기였죠. 하지만 그게 시발점이 되어 옛 은사를 만났고, 그 인연으로 지금 이 순간까지 왔다고 생각해요. 다들 제가 무모하다고들 하지만 저는 후회하지 않아요. 이제 막 즐거운 인생 2막이 시작됐으니까요.”

 

  30대 중반부터 시작한 일본어. 일본인 틈바구니 속에서 직접 몸으로 부딪히고 배웠던 경험은 ‘일본어를 살아 숨 쉬는 언어로 제대로 번역해보고 싶다’는 소망으로 발전했다. 새로운 도전에는 그녀의 생각을 지지하는 든든한 지원자들이 버팁목이 되어 주었다.

  오경순 교수는 마흔 한 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고려대학교 일본어교육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그때까지도 교수를 해야겠다는 목표보다는 좋아하는 번역 좀 더 잘하고자 하는 바람이 컸었다. 그녀의 자신은 공부에 대한 열정과 성실함이었다.

 

  이 태도가 다시 한 번 빛을 발했다. 석사학위는 박사를 취득하기 위한 과정처럼 느껴졌고,

여기서 멈추면 큰 의미가 없다고 판단해 결국 박사과정까지 밟게 된다. 안정적인 교사직을

포기하고 매 순간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달려오면서 일본어에 발을 들여놓은 지 17년

만에 취득한 박사학위였다.

  지금 오경순 교수는 세종대학교에서 일어일문학을 가르치며 진실한 보람을 느끼고 있다.

고등학교 교사 시절처럼 입시준비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친자식 같은 학생들에게 앞으로의

인생을 위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위주로 강의한다. 학생들의 황금 같은 청춘을 허투루

보내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미래가 불안해 잠 못 이루는 젊은이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다.

  “우리는 꿈을 가져야 한다고 하면 반드시 무언가 이루어야 하는 것들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다 보니 꿈을 이루지 못했을 때 상대적으로 좌절감이 크게 다가옵니다. 우선 적당한 크기의 꿈을 가지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꿈이라는 게 성취의 유무에 따라 가치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꿈을 갖고 열심히 살았던 매 순간 순간들이 진정 가치 있는 삶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혹시 인생의 길목에서 찾아오는 작은 고개를 오르기가 힘들다면 주변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 함께 넘도록 해요. 도움을 준 이들을 꼭 기억하고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게 중요하지요. 언제고 상대가 도움이 필요할 때는 자신이 도움 받았듯이 되돌려 주면 되는 겁니다.

따로 또 같이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평소 인간관계에 소홀하지 말고 인연을

소중히 여기라고 당부하고 싶네요.”

 

(2015.2.13)

 

 

 

Posted by 오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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