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지하철을 탔더니 ‘번역명문가’를 찾는다는 커다란 문구가 눈에 확 들어왔다. 드디어 드러나지 않은

번역명문가까지 찾아내어 대우해주는 세상이 되었구나 싶었다. 그런데 순간 ‘나라지킴이’와 번역의 조합이

뭔가 앞뒤가 안 맞고 이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번역명문가’가 아니라 ‘병역명문가’였다.


한창 우에노 지즈코의『독신의 오후』최종 교정을 보고 있을 때였다.

그럼 그렇지.

번역에 뭐가 씌어도 단단히 씌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참 희한하다. 지금 봐도 내 눈에는 여전히 <‘번역명문가’를 찾습니다>로 보이니 말이다.


박사논문 제출 때도 그랬다.

내가 쓴 논문을 최종 제출 마감시간까지도 수 십 번도 더 검토하고 수정하고 확인하고 재확인한 후 인쇄소로 보냈는데도 결국 박사논문 최종 인쇄본에 여러 군데 오타가 나와 잉크냄새도 채 가시지 않은 논문에 정정표까지 만들어 붙이며 난리를 피웠다. 인쇄 전에는 눈을 부릅뜨고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던 오타들이 인쇄 후에는 떡하니 바로 눈에 들어오다니… 참 어처구니없는 노릇이다.


이런 일을 겪다보니 이미 내가 세상에 내놓은 번역책이나 논문이나 단행본에도 부끄러운 오독이나 오역이나 오타가 있을까봐 두렵다.

뒤늦게라도 누군가 나의 이런 실수와 잘못을 지적해준다면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해야할 일인지.


번역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에서 번역을 가르치고 번역작업을 하며 번역논문을 쓰고 번역관련 책을 지으면서 지난 십수년 동안 번역과 동고동락해왔다. 오며가며 신문이든 텔레비전이든 책이든 거리의 간판이든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말이 ‘번역’이다. 이쯤 되면 직업병이라 할 만하다.

그래도 여전히 번역은 어렵고 갈 길 머나 먼 미완성이다.


번역은 문화의 힘이며 문화의 한가운데에 번역이 있다.

따라서 번역하지 않으면 문화는 확산되지 못한다.

문화와 언어와 사고가 다른 이문화 사이의 틈새를 줄여나갈 수 있도록 오랜 시간 꾸준히 번역하면서 번역자가 부단히 고민하고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번역에 정답은 없다지만 그렇다고 모든 번역이 정답인가?

내게 끊임없이 반복되는 ‘번역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우답(愚答)일지언정 내 경험상 지론(持論)을 말하자면 이렇다.


번역은 지난한 작업이다.

쉽게 쓰지 못해 다들 어렵게들 쓴다. 꽤 어려운 말과 글도 누구나가 이해하기 쉽게 쓰고 전달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대단한 능력이며 실력이다. 번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원문이 아무리 까다롭고 난해하더라도 독자가 이해하기 쉽고 읽기 편하게 옮길 수 있는 언어 구사 능력이 번역 능력이며 번역가의 가장 으뜸가는 자질이라 생각한다.

십여 년간 늘 번역을 가까이 하며 온몸으로 깨달은 사실 하나 ‘역시 질 좋은 번역은 뛰어난 외국어 실력보다는 한국어 실력으로 판가름 난다’는 생각에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번역에 왕도는 없다.

누구나가 번역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도 제대로 된 완벽한 번역을 하기란 불가능하다. 제대로 된 완벽한 번역이론 또한 있을 수 없으며 번역은 번역자가 실제 번역 작업을 해나가면서 끊임없이 어휘를 선택하고 한 땀 한 땀 다듬어가는 수작업 과정이다. 아무리 번역 이론을 많이 안다고 해도 직접 번역을 해보면서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번역의 비결, 지름길 따윈 없다. 그저 많이 읽고 많이 번역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자 지름길이다.


번역은 언어생활이다.

언어생활은 원활한 의사소통과 정확한 의미 전달이 목적이다. 의사소통과 의미 전달이 되지 않는 말과 글은 좋은 말, 좋은 글이라 할 수 없다. 번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번역자는 번역문 독자가 번역문의 정확한 뜻을 이해하는 데 방해받는 요인이 무엇인지를 파악하여 그 요인을 제거하고, 그 뜻을 전달할 수 있는 다양한 표현을 모색해야 한다. 번역가의 이러한 창의적 노력이 독자의 기대치에 부응하는 올바른 번역을 위한 작은 발걸음이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제아무리 어학 실력이 뛰어나고 이론을 꿰뚫고 있다 하더라고 실제로 번역을 해보지 않으면 제대로 된 번역을 하기 어렵다. 요리를 만들 최고의 주방용 칼과 신선한 제철 재로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누구나가 다 훌륭한 요리를 만들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1968년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岡成)의 소설『설국(雪國)』을 번역하여 일본 최초의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번역가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Edward Seidensticker)는 “칭찬을 받는 것은 작가, 비난을 받는 것은 번역가” 라 고백했듯이 잘해 봤자 본전, 까딱하면 반역이 되기 십상인 번역이지만 이 역시도 문화 메신저인 번역가의 숙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2014.12.15)

Posted by 오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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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어머니는 올해 92세이다.

동네 아파트 노인정에서 건강체조도 하시고 노래교실도 나가시고 화투도 치시며 철마다 노인정 야유회 등

이런저런 문화생활도 즐기시며 건강관리에도 철저하시다.

오히려 며느리보다 더 흥미진진하고 변화무쌍한 하루하루를 사시는 편이다.

일하는 며느리 입장에서는 참 다행이다 싶다.


지금으로부터 꼭 33년 전 결혼식이 끝나고 폐백을 올릴 때 시이모님들께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머니가 건강도 안 좋으시고 하니 앞으로 살면 얼마나 사시겠니? 어머님께 잘 해드려라.”


“사시면 얼마나 사시겠니?”로부터 바야흐로 33년이 흘렀다. 그 33년 동안 암수술도 한 번 하셨고 경미한 교통사고로 입원하신 적도 있지만 아직도 끄떡없이 정정하시다.

기억력은 나보다 훨씬 좋다. 얼마나 다행천만한 일인지 모른다.


난 늘 명절 때마다 “어머니 95까지는 끄떡없이 건강하게 사세요.”하면서 절을 올렸다.

그런데 내일 모레면 95세이니 내년에도 이런 레퍼토리(?)로 절을 올리는 날에는 불효막심한 며느리가 되는 건 시간문제다.


그래서 내년부터는 “어머니 100세까지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세요.” 라는 대사를 미리 준비해두고 있다.

그러나 이 레퍼토리도 언젠가 수정해야 하는 날이 오지 않으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나도 그렇지만 대체로 내 주위 사람들도 상황이 매 한 가지이긴 마찬가지다.


2008년 73세로 작고한 일본의 유명한 저널리스트며 뉴스캐스터인 지쿠시 데쓰야(筑紫哲也) 씨의 책『스로우 라이프(スローーライフ)』를 보면 ‘인생7곱하기론(人生七掛け論)’이라는 수긍할 만한 그의 지론이 나온다.

인생 50년 시대와 달리 지금은 인생 100년 시대이므로 자신의 나이에 0.7을 곱한 나이로 생각하며 살아야 마땅하다는 논리이다. 예를 들어 지금 90세라면 63세의 마음가짐으로, 50세라면 35세 젊은이의 감각으로 살아야 타당하다는 논리다.


‘인생 7곱하기론(人生七掛け論)’뿐만 아니다. 

‘인생 6곱하기론(人生六掛け論)’까지 등장했다.


계산법은 이렇다.

인생 50년이 인생 80년으로 늘어났으니 50÷80=62.5%, 즉 0.625 이므로 이를 배율로 따지면 수명은 1.6배로 늘어난 셈이 된다. 따라서 현재 68세라면 68×0.625=43세가 된다는 거다.


‘인생7곱하기론(人生七掛け論)’과 ‘인생6곱하기론(人生六掛け論)’을 절충해보면 현재 50세 이상이라면 연령×0.625의 계산법이 타당할 듯하고, 50세 이하라면 연령×0.7의 계산법을 사용하면 인생 50년 시대 적 자신의 나이가 나온다.


어찌됐든 나와 같은 50세 이상 된 사람에게는 기분 상으로도 삼 사 십대 젊은 그 때 그 시절로 되돌려 준 느낌이니 일단은 대환영이다.


내가 30대 무렵 어느 일본신문 칼럼에서 ‘30대는 人才, 40대 人財, 50대 人罪’라고 글귀를 본 적이 있다.

아마 요즘에 이와 같은 칼럼을 썼다면 필자나 신문사에 항의 전화로 대소동이 빚어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요컨대 ‘인생7곱하기론’으로 보면 올해 92세인 우리 어머니는 64세이고 며느리인 나는 41살밖에 안 된 거다. 인생 100년이라 가정할 때 아직도 어머니는 수명이 36년이나 더 남았고 나는 딱 반이 더 남아있는 셈이다.


그러나 마냥 오래 사는 것을 좋아할 만큼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그래서 장수(長壽)는 축복이자 리스크라 하지 않았던가.

이 리스크 관리술에 따라 장수가 축복이 될지 저주가 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아찔하다.


결국 버나드쇼처럼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고 땅을 치며 후회하게 될까봐.

(2014.11.25)

Posted by 오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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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늘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획기적인 세계로 나아가려 꿈꾸지만 결국 우리가 꿈꿔왔던 행복과 바람 또한 우리 일상 테두리 안에 존재함을 알게 된다.

 

우리는 평화롭던 일상에 아주 작은 균열이 생겨서야 비로소

여태껏 눈에 보이지 않았던 일상의 평범함과 소박함이 소중했음을 깨닫게 된다.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법.

그저 우리가 모르고 지나 칠 뿐이다.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행복과 사랑은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데……

 

살아있는 존재만으로도 삶의 이유가 되고 위안이 되는 아름답고 귀한 사람을 곁에 두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다.

자신의 존재로 단 한 사람이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희망과 용기를 품을 수 있다면 그 건 기적처럼 위대한 일이다.

 

우리는 그저 나이를 먹는 게 아니다.

살다보면 살아온 만큼 많은 이들을 만나게 되고

우리가 만난 이들의 수만큼 현명해지며, 그들에게 “감사합니다.”하며 건넨 인사만큼

우리의 일상은 밝고 여유롭고 윤택해진다. 

이것이야말로 나이가 가져다주는 값진 자산이다.

 

우리가 간절히 바라고 그리던 멋진 세상은

언제나 지금 여기 우리의 일상 속에 있음을 이제는 안다.

 

인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짧다.

더 늦기 전에 서로에게 빛이 되는 살아가는 기쁨을 나누었으면.

한 번이라도 더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하는 따스한 정(情)을 주고받았으면.

 

‘감사합니다’는 지금 이 순간 내가 살아있어 얼마나 행복한지……

그런 마음으로 넘쳐나는 당신에게 보내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내 곁에 있어 얼마나 행복한지요.

“오늘도 감사합니다.”

“今日をありがとう!”


(2014.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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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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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본어를 모르지만 이 책 참 괜찮다는데 번역 한번 해보지 않을래?”

 

소노아야코(曽野綾子) 선생의계로록(戒老録)과 나의 첫 만남은 1997년 가을 뜻밖의 길목에서 그렇게 우연히 시작되었다.

 

계로록(戒老録)』을 맨 처음 내게 건네주셨고 지난 십 수 년 간 내가 걸어가는 길목 길목마다 늘 사랑과 격려로 말없이 지켜봐주시는 박경자 선생님과의 오랜 인연 덕분이었다.

 

행운은 우연과 필연사이를 거닐고 있다더니만, 인생의 내리막 고개 길에서 주춤거리고 있을 때, 나는 운 좋게도 산책 나온 행운과 마주친 것이다.

 

이 책을 계기로 내가 번역의 길로 들어서게 될 줄이야…

그리하여 새로운 낯선 길에서 많은 사람과의 아름다운 만남으로 살아가는 즐거움을 갑절 만끽하게 될 줄이야…

 

번역을 마치고 나서 제일 먼저 아버지께 보여드렸다.

“이건 꼭 내가 살아 온 얘기고 앞으로 내가 살아갈 길을 말해주는 내 맘과 꼭 같은 책이로구나”

아버지의 그 말씀 한 마디는 여태껏 번역을 해오면서 가장 든든한 빽이었고 번역의 노동은 어느 샌가 아버지를 다시금 추억할 수 있는 기분 좋은 작업이 되었다.

 

‘인생에 진미(眞味)기간이란 없고 꿈이 있는 한 인생에 정년은 없다.’

번역을 처음 시작했을 때나 지금이나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과 만나는 즐거움이 큰 격려가 되기도 하고 흥미진진한 새로운 길로 접어드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우연히 내게 다가온 번역의 숲속을 산책하면서 묵묵히 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소박하고 정다운 이들과의 만남으로 내 삶의 호흡이 얼마나 깊어지고 또 풍성해졌는지.

역시 돈 부자가 아니라 사람 부자가 되라는 말은 언제나 유효하다.

많은 사람들을 만날수록 그만큼 행복의 확률도 커진다는 말일테다.

 

내 앞에 길이 놓여있는 한 나는 어디로든 나아갈 것이다.

내 앞에 길이 보이지 않으면 나의 길을 스스로 만들며 걸어갈 것이다.

또 누가 아랴?

이미 남들 다 지나간 먼발치에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터덜터덜 걸어가다 보면 또 다른 행운과 맞닥뜨리게 될는지를.

 

아무리 생각해봐도 참 고맙고도 신기하다.

『계로록(戒老録)』을 번역한 나의 첫 번역서『나는 이렇게 나이들고 싶다』는 십여 년간 30쇄 이상을 거듭하며 지금도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기적처럼 이 세상을 살다 떠나가신 아버지, 그리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외롭고 힘들게 치매로 투병하다 아버지 곁으로 떠나신 어머니, 나는 언제까지고 이분들을 잊을 수는 없다.

꿈과 희망을 등에 지고 걸어가는 인생의 여행길에서 오늘처럼 좋은 일이 있을 때면 가장 먼저 달려가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은 이들이다.

 

불어로 행복(le bonheur)이란 기분 좋은 한 시간 (bonne heure)을 의미한다고 한다.

하루 24시간 중 23시간이 즐겁지 않았어도 단 한 시간만이라도 즐겁고 기분 좋게 보냈다면

오늘 하루는 행복한 날이 아닐까?

 

Posted by 오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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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번은 젊고 한번은 늙는다

인생에 이렇게 공평한 원칙이 어디 또 있는가

 

그러므로

젊은 사람은 늙은 체하지 말고

늙은 사람은 젊은 체하지 마라

 

그러나

젊음 그 자체가 경쟁력이고 늙음 그 자체가 짐이 되는 세상

나이듦의 어려움

나잇값하기의 어려움

나이들어 가는 인생은 갈수록 버겁다

 

그래도

늙음을 두려워하지 마라

젊음도 늙음도 결국 미완성

 

나이는 인생 최후의 완성을 위한 선물

실패의 구실로 삼지 마라

 

어떻게 태어난 인생인데

지금 이 순간에도 속절없이 시간은 나를 떼민다

 

우왕좌왕하지 마라

고민할 틈도 없다

 

인생이란 한 걸음 한 걸음 완성으로 나아가는 과정

또 누가 아랴?

먼 길 돌고 돌아가는 이 길이 최선의 지름길일는지를

 

삶은 언제 어디서나 조금은 행복하고 조금은 불행하긴 다 마찬가지…

 

 

 

< 행복이란 누군가가 늘 내 곁에 함께 있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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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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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기다리는 인생의 세 가지 고개(人生に待ちうける「まさか?」の坂 )

오르막 고개 ․ 내리막 고개 ․ 설마 하는 뜻밖의 고개

 

인생에는 세 가지 고개가 있다.

오르막 고개와 내리막 고개 그리고 설마 하는 뜻밖의 고개.


뜻밖의 고개라는 인생의 덤과 같은 행운은 어느 날 우연히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예기치 않은 모습으로 다가오는 거라고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나는 대학에서 영어교육을 전공했다. 대학을 졸업한 1980년 봄 5월부터 한 고등학교에서 길지도 짧지도 않은 11년간을 영어교사로 근무하였다. 그러다 느닷없이 1991년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떠났고 도쿄 히가시나카노(東中野)라는 아담하고 조용한 동네에 첫 보금자리를 마련하였다. 그 때만해도 히가시나카노에는 한국인이 별로 없었다. 여섯 살 큰딸아이와 세 살 작은아들 나 이렇게 세 명 모두 일본어는 깜깜 젬병이었다. 우리 집 네 식구 중 유일하게 일본어를 할 줄 알아 동네 슈퍼에서 먹고 사는 데에는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던 건 그나마 더듬더듬 거리더라도 돈 계산이 가능했던 남편의 알량한 일본어 덕분이었다. 돌이켜보면 그야말로 온 식구가 좌충우돌 천방지축 허둥지둥 대던 격동의 5년간이었지만 돌아갈 수만 있다면 다시 돌아가고 싶은 내 인생에서 최고조로 다이나믹하고 흥미진진했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희희낙락했던 좌충우돌 5년간의 일본 도쿄생활을 뒤로 하고 1996년 서울로 귀국하였는데 떠나기 전과 후

나나 우리 가족에게는 크고 작은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다. 내게 크게 달라진 점 한 가지를 꼽으라면 정식으로 학교에서 배운 게 아닌 난생 처음 살아본 타국 일본에서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 생활 속에서 백프로 일본사람 틈바구니 속에서 온 몸으로 익힌 생활일본어 능력?이 아닐까 한다.


그 땐 그랬다. 일본어 말하는 것 하나만큼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넘쳤다. 대학교에다 비싼 등록금 내며 전공

까지 하면서 배운 영어와 아이들 키워가며 일본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손짓발짓 써가며 먹고 입고 돌아다니며

일상생활 속에서 그것도 공짜로 배운 일본어는 분명 자신감에서부터 차이가 있었다. 앞으론 일본어로 하는

일이라면 못할 게 없어보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 웃기는 노릇이었지만 어디서 나왔는지 그런 무모한 용기

덕분에 귀국 후 대학원 일어교육과에도 진학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것저것 죄다 알았다면 무턱대고 도전을 하기는 쉽지 않았을 테다.


졸업 후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대학동창들은 지금도 내가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고 하면 영어를 가르칠 거라고 생각하는 친구들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똑같이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영어교사로 11년간이나 재직했으니 일본으로 건너 간 5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턱이 없는 친구들이므로.


아무튼 2001년 2월 일어교육과 대학원 석사를 마치고 그 이듬 해 3월 서울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다.

대학 강의라지만 좀 특별한 강의였다. 내가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한 1998년 당시는 일본어가 꽤 잘 나가던 시절이었다. 일본대중문화 개방이 시작되면서 일본 애니메이션, 비디오, 공연, 음반, 게임, 방송 등이 본격적으로 일본대중문화 봇물 터지듯 개방되고 확대되었다. 그러한 인기 여파로 고등학교 입시에서 제2외국어로 불어나 독어보다는 많은 학생들이 일어를 선택하거나 소수가 중국어를 선호하던 때였다. 일본어 인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다.


그러면서 일선 고등학교에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학생들이 대부분 일어를 선택하다보니 일어교과

과정이 늘어나면서 자연히 일어교사 수요가 많아지자 일어교사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가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러자 교육부에서 전례 없는 희한한 대책 하나를 내놓았다. 서울시내고등학교 불어교사와 독어교사를 대상으로 서울대학교에서 일본어교사특별양성과정 프로그램을 운영하였는데 이들 불어교사와 독어교사에게 1년간 일본어를 집중적으로 교육시키고 시험을 치르게 해 시험에 통과하는 선생님들을 일본어교사로 새로 발령하는 제도였다.

전례 없던 이런 급작스런 제도 탓에 기존 사범대학 일어교육과 교수와 학생들의 반발 내지 불만도 터져 나왔고, 단 1년간의 교육으로 과연 제대로 된 일본어 교사 양성이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 백년대계는커녕 땜빵식 교육제도라는 비판, 교육받는 당사자인 불어교사와 독어교사들의 자존감 상실 및 시대변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냉엄한 현실적 문제 등등 여러 목소리가 들끓었다.


그러나 이런저런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일본어교사특별양성과정은 교육부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불어선생님과 독어선생님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는 독특한 프로그램에 나도 일본어 강사로 참여하게 되었다.


막상 그들 앞에 서니 그 모든 것이 기우였다.

불어선생님과 독어선생님들은 생각한 것보다 더욱 절박하고 절절한 마음과 눈빛으로 열정을 쏟으며 일본어 공부에 매진하였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이어지는 강도 높은 수업에 날마다 갖은 시험을 치러가면서.


나는 만감이 교차했다. 나도 십여 년 전에는 영어교사였는데 지금은 일어를 가르치고 있다니, 그것도 나와

비슷한 연배의 현직 선생님들 앞에서…

정말 인생은 알 수 없는 일의 연속이며 좀처럼 생각대로 되어지지 않는 사건의 연속이다. 


우째 이런 일이…

오늘 이순간이 내게나 그들에게나 뜻밖의 고개를 오르는 과정이리라.

그들도 아마 나와 똑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정말 값지고 내 인생 최고의 일 년을 보낸 후 수료식 때 선생님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편지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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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는 세 가지 고개(坂)가 있다고 합니다.

오르막 고개(上り坂)와 내리막 고개(下り坂) 그리고 설마 하는 뜻밖의 고개(まさか?)가 그것입니다.

저는 일본어「마사카(まさか)」라는 단어를 우리말로 옮길 때에는 ‘설마’ 보다는 ‘우째 이런 일이… ’로 곧잘 번역하곤 합니다.


오르막 고개(上り坂)와 내리막 고개(下り坂)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늘 되풀이되는 그런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마사카(まさか)」라는 고개는 그리 흔한 고개가 아닙니다.

인생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하는 그 정도일 것입니다.

이「마사카(まさか)」라는 고개를 힘겹게 오르다보면 시야가 넓어져 풍요롭고 다양한 인생을 즐길 수도 있으며 새로운 낯선 길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기도 합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새로운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그만큼 인생의 묘미를 갑절로 만끽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선생님들의 일 년간의 일본어교육과정은 그야말로「마사카(まさか)」라는 고개를 땀 흘리며 묵묵히 걸어오신 시간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와 선생님들과의 인연 역시「마사카(まさか)」라는 고개가 없었다면 결코 만날 수 없었던 귀중하고 아름다운 순간들이었습니다.

함께 손잡고 지나 온「마사카(まさか)」라는 고개는 앞으로 선생님들의 인생에서 두고두고 값진 전기(転機)가 되리라 확신합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선생님들과 마주했던 소중한 시간들 정말로 즐거웠습니다.

2003년 2월7일 오경순.


2014.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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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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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모님은 이북 출신으로 일사후퇴 때 남한으로 내려오셨다. 아버지 고향은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꽃으로 유명한 평안북도 영변(寧邊)의 약산(藥山)이고 어머니 고향은 마찬가지로 평안북도 신의주이다.

일사후퇴 때 남한으로 내려오실 당시 아버지는 서른일곱, 어머니는 서른셋의 푸릇푸릇한 청춘이었다.


나는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꽃에 나오는 “영변에 약산 진달래 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를 국어책에서 처음 접했을 때는 그런가보다 하고 별 감흥은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약주를 드시곤 어쩌다 한번 씩 영변의 약산 고향 얘기를 꺼내실 때부터는 진달래꽃이 지천에 흐드러진 영변의 약산이 더 이상 그저 국어책에나 있는 그런 영변의 약산이 아니었다.

강산에의 노래처럼 아버지 어머니가 죽기 전에 꼭 한번 만이라도 가보았으면 여한이 없겠다고 간절히 원하셨던 그러나 끝내 가보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갈 수밖에 없었던 진달래꽃 검붉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회한의 약산이 되어버렸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사후퇴 때 허둥지둥 맨몸뚱이 하나로 빠져나오느라 부모형제들과도 생이별을 하고 간신히 목숨 하나 부지한 채 살기 위해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셨다. 그 이후론 부모님의 생사도 그렇고 이북에 두고 온 형제들의 생사도 도통 알 길이 없었다. 그러다가 일사후퇴 때 부산까지 피난 내려갔었는데 거기서 오다가다 내게는 유일한 이모인 어머니 동생을 우연히 만났다고 한다. 어머니는 세 자매였으니 어머니의 큰언니는 그 후 그렇게 영영 행방불명자가 되어버렸다.


아버지도 삼형제였는데 휴전이 되고 난 후 어떻게 물어물어 수소문 끝에 바로 아래 동생은 찾을 수 있었지만 아버지 바로 위 큰형님은 결국 살아생전엔 만날 수 없었고 그렇게 이 세상에서의 간절한 삼형제의 해후는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래서 내 어렸을 때 친척이라곤 이모 한 분, 작은아버지 한 분 이렇게 달랑 두 분뿐이었다.

나는 지금도 이북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해방촌에서 가까운 용산동에서 사남매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요즘이야 여러 가지가 좋아져서 오십 전 후에도 출산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내가 태어날 당시만 해도 마흔이 넘어 애를 낳는 경우는 여간해선 드물었다 한다. 아버지 어머니 두 분 다 마흔을 훌쩍 넘겨 나를 낳았으니 가진 것 하나 없어도 늦둥이 막내딸에 쏟은 남다른 애달픈 사랑을 나는 두고두고 잊지 못한다.


나는 1970년대 중반 우리집에서 엎드리면 코 닿을 데에 있는 수도여고를 다녔는데 당시는 각 중학교․ 고등학교마다 자율적으로 조직된 ‘새마을어머니회’라는 학부모 모임이 있었다. 다달이 어머니들이 학교에 와 회의를 하곤 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우리집은 학교가 가깝다보니 학교에서 벌어지는 행사나 모임 등을 쉽게 전해 듣거나 알 수 있었는데 어머니가 어디서 알아냈는지 내가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는데도 ‘새마을어머니회’ 건으로 나몰래 학교에 오게 되는 날이면 친구들은 내게 “경순아 니네 할머니 오셨다.”고 할 정도였다.

그 당시는 내 친구들 엄마보다 훨씬 늙고 가난한 어머니 모습을 웬만하면 꼭꼭 숨기고 싶었는데 가진 것 하나 없는 늙고 초라한 어머니가 막내딸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이 그것뿐이었음을 내 가난한 마음 탓에 그 땐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버지는 평생토록 아주 건강하셨다. 팔십 육세에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 흔한 건강검진 한번, 입원 한번 한 적이 없었다. 말년에 어머니가 치매로 십여 년간 투병할 때 곁에서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하시다 결국 진이 다 빠져 어머니보다 먼저 떠나가셨지만. 어머니 병구완만 아니었다면 아버지는 아마 100세까지도 끄떡없지 않았을까 싶다.


아버지는 일사후퇴 때 남한으로 피난 나와 기적처럼 상봉한 열세 살 터울의 동생과 우애가 남달랐다. 일흔 줄에 들어섰을 때도 아버지는 여전히 건강했지만 한참 아래 동생은 풍기가 생기며 걸음걸이도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속이 타들어가며 한숨이 깊어져만 갔다.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삼십 여 년 전쯤으로 1980년대 중반이었을 게다.

1980년대만 해도 우리같은 서민들은 생활 물품도 귀하고 특히 커피나 양주 등 외국산 물건은 구하기도 어려워 웃돈주고 사곤 했던 시절로 기억하고 있다.


그 때는 왜 그랬는지 병명과 상관없이 우황청심환이나 구심(求心)을 만병통치약인양 구해서 먹고들 하였다. 그러다보니 우황청심환은 시중에 가짜도 많이 나돌아 중국산 진짜를 구하기 위해 중국을 다녀온 사람들이나 중국상들에게 비싸게 사서는 여차할 때를 대비해 가정상비약처럼 비축해두기까지 했다.


아버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버지가 만병통치약으로 감쪽같이 믿고 있는 진짜 우황청심환을 간절하게 구한다는 소문이 동네에 자자하자 아예 중국에서 직접 공수했다며 우황청심환을 정기적으로 대주는 브로커까지 등장했다.

아버지는 허투루 쓰지 않고 한 푼 두 푼 아껴가며 모은 적지 않은 돈을 브로커에 지불하며 동생에게 줄 우황청심환을 열심히 사서 모았다.

“우리 영근이가 이 우황청심환을 먹으면 곧 걷게 될 거야.” “이 약 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나니까 구하지 돈 주고도 못 구한다구”하면서 말이다.


나는 곁에서 지켜보면서 아버지가 터무니없는 돈을 지불하며 사들이는 우황청심환이 진짜일리도 없고 약효가 있을 리 만무하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눈치 챘지만 아버지에게는 끝내 말하지 못했다.


유식한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아버지가 동생에게 사주는 우황청심환은 가짜약일지라도 진짜보다도 더 강력한 플라세보 효과(僞藥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반드시 병세가 호전될 거라는 간절한 믿음을 가졌던 아버지에게나 작은아버지에게 우황청심환은 두 사람의 우애와 정성과 소망이 더해져 반드시 실현되고야 만다는 자기체면에 빠지게 만드는 그야말로 만병통치약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나 작은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에 안 계시지만 요즘처럼 생각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에는 아버지가 그 옛날 우황청심환에 걸었던 주문처럼 플라세보 효과일망정 잘될 거라는 자기주문을 걸게 된다.

나도 아버지처럼 정성을 다하고 간절히 소망하면 어떠한 꿈과 소망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다.

(2014.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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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ond Life Start, 50대


우리 모두는 가능한 한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어 한다.

아무 탈 없이 행복하게 천수를 누리고 싶은 마음은 우리 모두의 본능이다.

그러나 장수(長壽)는 축복이자 리스크이다.


어떤 이는 인생 80년을 계절과 색으로 나타냈을 때 출생에서 10대까지 20년간은 봄이며 파랑색이고, 20대에서 30대까지의 20년간은 여름이며 주홍색, 40대에서 50대까지의 20년간은 가을이며 흰색, 60대에서 70대까지의 20년간은 겨울이며 검은색, 80대 이상은 계절과 무관하여 무색이고 천명에 순응하는 나이라 말하기도 했다.

인생 90~100년 한가운데에 40대와 50대가 있다. 40대란 인생 전반부의 최후의 연령대이며, 50대는 인생 후반부의 최초의 연령대가 된다. 가령 인생에 ‘진미기한(眞味期限)’이 있다면, 40대는 가장 맛이 좋은 시기이며, 50대는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인생의 최적기라고도 할 수 있다.


이렇게 인생의 한창 때인 50대에 앞으로 남은 그리 짧지 않은 30~40여년이란 세월을 멋지고 보람 있게 보내기 위해서는 제2의 인생을 맞이할 준비를 미리미리 철저하게 해나가지 않으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과연 나는 내게 무엇을 남길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 자문했을 때 답이 보이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지금까지는 살아오면서 오로지 일에만 전력투구해 온 이른바 ‘회사인간’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평생직장, 정년보장이 가능했던 시대에는 ‘회사 인간’만으로도 보람을 느끼고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다변화 다양화하는 사회에서는 지금까지의 가치나 사고 개념이 크게 바뀌었으며, 더 이상 과거의 미덕이 현재에도 유효하리라 믿고 있는 사람들도 별로 없다. 일만하는 ‘회사인간’은 반쪽 인간 취급받기 십상이다. 오늘날은 일과 취미, 두 마리 토끼를 쫒는 사람이 인생에 성공할 가능성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그래서 가장 이상적인 모델은 ‘일을 취미로, 취미를 일로’ 즐겁게 해나가는 사람이다. 즉 일과 취미 두 마리 토끼를 쫓는 사람이 일류로 인정받는 세상이다.


인생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한 사람이 승리자라는 말도 있다. 50대에는 좀 더 ’대담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계획하라‘고 내 스스로에게 권한다.


오늘 건강하고 아무 탈이 없다고 해서 내일도 그러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누구도 자신의 건강 한치 앞도 내다볼 수가 없다. 불청객인 큰 병의 징후는 주로 50대에 나타난다고 한다. 대개 병이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50대의 몸은 자동차로 치면 중고차다. 부품의 고장을 모르는 채 달리고 있는 것과 같다. 속도를 줄이고 정기 점검을 잊지 말자. 건강에 과신과 방심은 절대 금물이다.


그러나 어느 날 느닷없이 맞닥뜨리게 되는 암이나 심장마비와 같은 큰 장벽이야 어쩔 수 없다손 쳐도 인간관계와 우리 건강의 상관관계는 비례한다고 한다. 요컨대 마음을 터놓을 친구가 많다거나 인간관계가 원만한 경우 암과 심장질환 등에 걸렸어도 그만큼 회복이 빠르다는 얘기다. 사람부자가 결국 건강부자라는 말일 테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크게 느껴지는 것이 돈의 힘과 가치이다.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지만 지옥에서 선악을 가르는 재판도 돈에 좌우된다고 하듯 돈이 없는 인생 또한 순탄한 인생이 되기 쉽지 않다. 돈이 있으면 편리하고 없으면 불편한 건 누구에게나 다 마찬가지다. 어느 정도 돈이 있어야 인생의 가능성도 그만큼 늘어난다.


그러나 돈과 운은 사람이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많이 만날수록 그만큼 운과 맞닥트릴 확률도 커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또 다시 돈 부자보다는 사람 부자가 되어야 한다.

(2014.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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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세계 최장수 국가인 일본인 평균수명을 보면 여성은 약 87.14세, 남성은 약 80.98세(2016년 후생성 통계자료)이다. 이 통계는 과거 10년 전보다 남성, 여성 공히 3세씩 늘어난 수치다. 또한 현재 일본 전체 인구의 27% 즉 일본 인구 4명중 1명이상이 65세 이상 노인들이다. 가히 노인천국이라 할만하다.


한편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여성은 약 85.2세, 남성은 약 79세로 세계 제 1위 최장수 국가인 일본과 거의 막상막하다. (2017년도 행정안전부 통계자료)

또한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 인구는 2017년 현재 전체 인구의 14.02%를 차지하면서 처음으로 14%를 넘어섰다. 지난 2000년엔 7.2%로 ‘고령화사회’에 진입한지 17년 만에 ‘고령사회’가 된 셈이다.

 

유엔은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7% 이상이면 ‘고령화 사회’, 14% 이상은 ‘고령사회’, 20%를 넘으면 ‘초고령사회’로 구분한다. 미국의 경우 ‘고령화사회’에서 ‘고령사회’로 전환하는 데는 69년가량 걸렸고, 영국은 45년, 일본은 25년가량 걸렸다.<서울경제http://www.sedaily.com(2017. 9. 3)> 이러한 통계들을 볼 때 현재 진행되는 우리나라 고령화 속도는 일본보다도 훨씬 빠른 셈이다.

 

어느덧 인생 80년, 90년 시대도 지나고 바야흐로 백세인생 시대를 살고 있다.

인생 70~80년 시대에는 그런대로 20-30-20의 공식 통용되었다. 즉 20세까지 공부하고 50세까지 30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며 돈을 벌어 그 후 남은 20여 년 동안 넉넉하지는 않으나 그럭저럭 노후생활을 꾸려나갈 수가 있었다. 그러던 것이 인생 90~100년 시대에 접어들면서 30-20-30(40)의 공식으로 바뀌어버렸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경쟁력을 갖추려면 30년 정도는 공부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직장생활 기간은 10년이 줄어드는 반면, 노후생활은 10~20년이나 늘어난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투자기간은 늘고 회수기간은 줄어드는 적자 인생이 되기 십상이다. 수명은 늘어나는데 아무런 경제적 대책이나 준비 없이 노후 30~40년을 보내야 한다면 생각만 해도 막막한 노릇이다.


40대는 인생 90~100년이라는 긴 마라톤 경주의 중간 지점, 즉 반환점에 다다르는 시기다. 지금까지 앞만 보며 쉬지 않고 달려 온 기나긴 길의 반환점을 돌아 결승점을 향해 여태껏 달려온 그 이상을 또 다시 달려가야 할 시점이다. 반환점부터는 주위의 풍경도 바라보고 그동안 박수를 보내 준 고마운 이들과 자신이 걸어왔던 희노애락 경험을 떠올리면서 마음의 여유를 안고 달려가야 한다. 출발할 때는 내가 최고며 최선을 다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으리란 기대와 자신감으로 벅차올랐을지 모르지만, 반환점을 돌아가는 시점부터는 세상일이 반드시 내 생각대로만 되어지지 않는다는 현실을 조금씩 눈치 채 가면서 아무에게도 탁 터놓고 말 못할 사연 한 두 가지 씩은 가슴에 품고 달려가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이 세상에 인간의 힘으로 이해 못할 인간의 일이 별로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라는 소설가 정이연의 말이 귀에 속속 박히는 때도 40대쯤이 아닐까.


40대는 시간을 갖고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그러나 진지하게 남은 인생을 계획해 볼 때이다.

‘감동(感動)’이란 세상에 대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감동의 의미를 제대로 음미할 수 있는 나이도 40대가 아닌가 싶다.


40대에는 취미 활동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래야 앞으로 남은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보낼 수 있고 삶의 보람도 느낄 수 있다. 어떤 이는 취미란 ‘쓸데없는 것에 대한 정열’이라고도 한다.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정도까지 푹 빠져서 즐길 수 있으면 더욱 좋다.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를 잘 살려서 제 2의 직업으로 삼을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취미는 돈이나 세상의 이해득실과는 관련이 없는 경우도 많다. 내가 좋아서 하는 취미 활동은 세상의 온갖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즐겁다.


건강도 장수도 능력이며 축복이다. 이런 의미에서 40대의 취미활동은 정서적으로 편안함을 안겨주는 좋은 친구이자 동반자이다.

40대의 취미는 어느 정도 낭만적일 필요도 있다. 여행도 혼자 떠날 수 있는 용기와 여유가 있어야 진정으로 떠날 수 있기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물 앞에서 사진을 찍는 것도 좋지만 낯선 이국의 작은 골목길을 들어서다 마주친 창가에 놓인 작은 화분과 피아노 소리, 오래된 빵집의 멋진 간판 글씨에서도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 40대의 여행이다. 혼자 가까운 산을 찾아 땀 흘리며 올라, 구름 위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도 40대의 낭만이다.

 

 

 

가끔 여기저기 매스컴에서 현대사회를 ‘지식사회’니 ‘정보화 사회’니 하며 또한 지식사회에서는 ‘Network’와 ‘Knowhow’가 중요하니 어쩌니 운운하지만, 아주 쉽게 얘기해 ‘Network’는 ‘인간관계’이고 ‘Knowhow’는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그 분야의 경험’이다. 그동안 우리가 세상을 살아오면서 온몸으로 터득한 지혜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여태껏 살아오는 동안 지금까지 맺어 온 인간관계를 소중히 여기며, 자신이 몸과 마음을 바쳐 일해 온 분야의 경험을 최대한 살려 활용한다면, 지식사회든 정보화 사회든 당당하게 살아가는 데에 커다란 힘이 될 터이다.

(2014.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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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간 교직생활에 사표를 던지고 일본으로 떠난 35세


오늘날 종신고용제의 붕괴는 전 세계 공통 현상으로 우리나라도 예외일 리 없다. 요즈음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사회적, 경제적으로 경기 회복 전망이 부정적이고 불투명한 아주 어려운 여건 속에서 마치 바늘구멍과도 같은 ‘취업전쟁’을 치르고 있다. 이런 와중에 취업에 성공한 이는 그나마 행복한 청춘들이다. 그러나 일단 취업에 성공했더라도 첫 취업한 회사에서 평생 몸 바쳐 일하리라 다짐하는 사회 초년생들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그들의 이직 연령을 보면 평균 35세 정도라 한다. 다시 말해서 대체로 35세 즈음에 자신이 몸담고 있는 회사에 회의가 일고 장래 비전 여부를 판단하고 단념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점에서 인생의 첫 번째 기로(岐路)는 35세쯤이 아닐까 싶다. 남녀 공히 대체로 35세가 되면, 지금까지 자신이 걸어 온 길을 한번쯤 의미 있게 되돌아보게 되며 새로운 진로 선택과 결단의 시기를 맞이하는 경우가 많다.


나도 그랬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 해 5월 운 좋게 경기도의 한 사립 고등학교 영어교사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때가 1980년 5월이다. 그 후 줄곧 같은 학교에서 11년간 근무를 하였고 내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해야겠다고 큰맘 먹고 그야말로 내 푸르디푸른 청춘과 열정을 쏟아

부었던 정들었던 학교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훌쩍 일본으로 떠난 해가 1991년이니 내 나이 서른다섯 무렵의 일이다.


사실 대학 졸업 후 곧바로 교사생활을 시작했기에 소위 말하는 재충전 시간이나 자유 시간 따위의 여유는 생각할 겨를 없이 11년간을 달려왔기 때문에 5년을 주기로 뭔가 변화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고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이 반복되는 일상에 일종의 회의감과 권태감이 한없이 밀려왔다.


우리가 인생에서 어떤 단계를 거치는 과정은 대체로 5년 단위이며 이 5년이란 시간은 나날이 거센 파도처럼 밀어닥치고, 차곡차곡 쌓이는 다양한 경험을 앞으로의 인생에 ‘내공’을 만들 수 있는 중요한 시간 개념이라고 어떤 이가 한 말에 실제로 내가 체험했기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아무튼 내경우도 살아오면서 손에 넣은 기득권이라 할까 안정에 대한 미련을 깨끗이 버리고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또 다른 새로운 세상을 향해 모험과 도전을 강행한 시기도 정확하게 내 나이 서른다섯이었다.


그렇다면 왜 35세가 인생의 분기점이 되는가를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 물론 20대나 40대가 새로운 방향의 모색과 결의를 다질 때 30대에 비해 근본적으로 자질부족이라든가 바람직하지 않은 연령대라는 말은 아니다. 각각의 나이 대에 어울리는 플러스측면과 마이너스측면이 있겠지만, 인생의 중대한 고비에서 과감한 변신을 꾀하고자 할 때 상대적으로 플러스측면이 많으며 설사 실패하더라도 만회 가능한 나이가 30대이기 때문이 아닐까.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 쉽게 포기해버리거나, 지식과 정보량은 많으나 지혜가 부족한 20대. 행동보다는 생각이 앞서고 손(損)과 득(得)으로 진퇴를 결정하거나, 추진력과 기동력이 떨어지며 불가능한 일을 미리 예측하여 모험을 두려워하는 40대.

이러한 20대와 40대의 마이너스적인 면을 보완하면서 플러스적인 면을 배가해가는 연령이 바로 30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패러사이트 싱글(부모와 동거하는 독신 남녀)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들이 계속 혼자 살더라도 부모 곁을 떠나가는 최후의 연령도 35세쯤이며, 모라토리엄(유예기간)의 끝도 역시 35세까지 라고 하는 사실은 참 흥미롭다.


누구든 30대 후반이 되면 자신의 능력을 가늠할 수 있어야하고, 자신의 대략적인 인생의 밑그림을 그릴 수가 있어야 한다. 간혹 예외는 있으나, 제아무리 높은 학력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대체로 35세쯤 되면 ‘인생 공부’의 시기는 종료되기 때문이다. 35년간이나 살아오면서 자신의 내일을 가늠할 수 없다면, 어지간히 시원찮은 인생을 살아왔거나 결단력이 부족했거나 둘 중 하나이리라.


수재는 되지 못하더라도 누구나가 천재는 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수재는 학교성적처럼 데이터로 확연하게 드러나지만, 천재와 수재는 근본이 다르다. 사람들을 잘 웃기는 천재가 있는가 하면, 말을 잘하는 천재도 있다. 35세가 될 때까지 ‘내게는 아무런 재능이 없다’고 낙담하며 살아온 사람은 유감스럽게도 그 후도 성공할 확률은 희박하다.


누구에게나 반드시 한 가지 ‘천재적 능력’은 있게 마련이다. 그것을 어떻게 빛나게 가꾸어나갈 것인가. 그것을 35세까지의 인생의 첫 번째 승부로써 조그마한 것이라도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자신만의 최고’의 경쟁력으로 공들여 다듬어 나가야 한다.


오늘날 직업은 다원화 세분화되고 있으며 전문분야일수록 더 더욱 세분화되는 경향이 짙다. 종합상식이 없더라도 사회에서 성공할 확률은 과거보다 훨씬 높아졌다. 자신의 업무에 대해서는 상당히 상세한 지식과 정보력이 요구되지만, 자신의 전문분야 이외의 것은 좀 미흡하더라도 업무상으로는 그다지 무리가 없다. 그러므로 사회생활에서 요구되는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정보나 지식을 터득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미리 겁먹고 포기할 필요는 없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엄청난 속도로 변화해가는 정보화 시대.

한숨 쉬며 고개를 떨구는 부류의 사람들과 지금부터 뭔가 재미있는 세상이 전개될 거라고 기대하는 부류의 사람들 중, 어느 쪽이 살아남을 것인가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무슨 일을 하든 자신감에 차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성공확률이 높다는 사실 또한 마찬가지다.

‘오늘은 재수가 좋다’고 생각하면 정말 그렇게 된다. 생각하기 나름이라 하지 않은가.


차분하고 조용한 시대에는 차분하고 조용한 생활이 필요하지만, 지금처럼 변화가 극심한 시대에는 거기에 대처하는 유연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언젠가부터 IT(인포메이션 테크놀로지)사회도 지나고 NT(나노 테크놀로지)사회에 진입했다고들 한다. 마이크로(1밀리의 천분의 일)기술에서 나노(1밀리의 백만분의 일)기술로 이동이다. 곧 들이닥칠 4차혁명 시대의 변화 속도는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훨씬 가속화할 터이다. 그렇다면 젊은이들이 성공할 수 있는 기회도 한층 광범위해지지 않을까.


그러나 안정된 직업은 결코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늘 명심해야한다.

'프리타'란 얼마 전까지 만도 안정된 직업을 갖지 못한 사람을 지칭했으나, 지금은 ‘그 재능을 한데 묶을 수 없는 인재’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자유롭게 여러 방면의 일에 종사하면서 오로지 자신의 능력으로 먹고사는 사람이며, 차세대 주자가 될 가능성이 그만큼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단 한 가지.

일을 끈기 있게 계속할 수 있는 사람이 프로고 중도에서 멈추면 아마추어다.

성공과 실패,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도 매 한 가지다.

중도에서 포기하면 실패, 끝까지 노력하면 성공이다.

(2014. 11. 2)

Posted by 오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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