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다락(多事多樂)했던 5년간의 도쿄생활을 마무리하고 1996년 11월 서울행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

그 때 내 나이 서른여덟이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5년간의 외도였지만, 좀 건방지게 들릴는지 모르겠으나 귀국 당시 도쿄와 서울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분명 내가 느끼는 문화 온도 차가 존재했다.


우리 속담에 “정들면 고향”이라는 말이 있는데 일본어에도 그와 똑같은 “스메바 미야코(住めば都)”란 속담이 있다. 아무리 보잘 곳 없고 불편한 곳일지라도 살다보면 정이 들고 살기 편해지기 마련이다.

그 새 도쿄가 마치 내 고향처럼 정이 푹 들었던 모양이다.

뭐랄까 5년간의 공백 혹은 도쿄생활에 적응하느라 단련된 내 몸에 붙은 잔 근육들이 내 마음과 따로 노는 듯,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고 두문불출하는 날들이 오랫동안 이어지면서 마음 또한 무겁고 심란하기만 했다.


뭔가 일상의 새로운 변화가 절실했지만 탈출구는 그닥 보이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희망에 부풀어 낙관적인 자신감으로 가득 찼던 내일이 갑자기 의욕상실로 불투명해지면서 걱정과 두려움이 앞섰다.


그런데 인생은 타이밍이라 했던가. 인연이란 게 참 묘하다.


1979년 학부 때 수업을 들으면서 강의실에서 처음 만나게 된 영어학을 전공하신 박경자 선생님이 계신다. 여느 교수와 학생처럼 두 학기 수업을 들으면서 미국에서 갓 귀국하신 선생님의 싱그러운 젊은 시절의 수수한 모습과 성함 정도 기억하는 게 전부였다.


그 이듬해 1980년 대학을 졸업하고 11년간 고등학교 영어 교사로 근무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갔으니 졸업 후 근 십여 년 이상 박경자 선생님의 근황을 알 리가 없었다.


1980년대만 해도 적어도 내 주변은 다들 그랬다. 대학을 졸업하면 당연히 취직을 하고 부모에게서 독립을 해야지 대학원에 진학한다든가 유학을 간다든가 하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대부분 우리 같은 일반서민들은 취직 이외의 다양한 선택지를 고려해볼 생각조차 하질 못했다.

돌이켜 생각해봐도 그 땐 왜 그리 오로지 취직만을 염두해 두고 인생계획표를 그렸는지 이런 저런 꿈조차 아예 왜 없었는지 지금 생각해봐도 이해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일본 생활에 한창 익숙해질 무렵인 어느 날 박경자 선생님한테서 전화를 받았다. 와세다 대학에 교환교수로 나왔노라고.


그 당시 보기 드물게 내 친구 중 유일한 학구파 친구가 하나 있었다. 뒤늦게 엉덩이 무겁게 진중하게 앉아 공부에 재미를 붙이더니만 아예 학문의 길로 접어든 그 친구의 지도교수가 바로 박경자 선생님이었다. 마침 선생님께서 일본에 나가시게 되었는데 일본어를 전혀 못 하시니 혹시 하는 마음에 내 일본 연락처를 알려드렸단다.


그리하여 박경자 선생님과 도쿄 신주쿠(新宿)에서 15년 만에 뜻밖의 해후를 하였다.

외국에 잠깐이라도 살아본 사람들은 그 마음을 잘 안다. 사돈에 팔촌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어쩌다 외국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얼마나 반갑고 신나는 일인지를. 같은 한국 사람이라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적어도 1990년대 만해도 그 땐 그랬다.


박경자 선생님과 나는 15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하리만치 두세 번 정도 더 만남을 이어가면서 아주 편안하고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다. 가까운 나라이기는 하지만 아마도 일본이라는 외국이었기에 쉬이 정이 들었으리라.


내가 일본어를 좀 한다고 도쿄 이 곳 저 곳을 함께 구경도 다니고 선생님께서 병원을 가신다거나 일본어가 필요한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통역자원봉사를 자청하면서 선생님 덕분에 나도 덩달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기약된 시간은 더 빨리 다가오는 법. 선생님의 교환교수 임기 일 년은 그렇게 쏜살같이 지나가 버리고 마침내 선생님과는 아쉬운 작별을 했다. 선생님이나 나나 지금보다 이십여 년이나 더 풋풋하고 쌩쌩했던 그 때 그 시절 도쿄의 추억 사진 몇 장을 남기고 선생님은 다시 바쁜 캠퍼스 일상으로 복귀하셨다.

 

    

 

선생님께서 떠나가신 후 예전처럼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내가 그 이듬해 서울로 돌아온 후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고 점차 생활의 활력을 잃으며 몇 달간을 그저 허송세월을 하고 있을 때 이번에도 또 선생님께서 먼저 연락을 주셨다.


“내가 일본에 있을 때 선물 받은 책이 한 권 있는데 우리 나이에 읽으면 좋은 책이라던데…나는 일본말을 모르니 네가 읽어보고 무슨 내용인지 알려줄래?” 처음엔 선생님의 미션에 답하기 위해 열심히 읽기 시작했는데 읽다보니 내게도 공감 가는 내용이 많아 일본어 공부도할 겸 아예 노트에 한 줄 한 줄 써가며 번역을 하기로 했다. 말이 번역이지 지금 보면 거의 해석이나 다름없었지만.


어느 것 하나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고 무료하고 따분한 시간을 보내던 중에 난생 처음 해보는 번역작업은 내 일상을 활력모드로 되돌려놓는 계기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렇다. 인생은 꿈과 희망을 등에 지고 걸어가는 여행길이다.

내일이 기다려지는 설렘이 있고 무언가 몰입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축복인가.

하루하루 삶에 뚜렷한 목표가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힘이 솟아나는 기분 좋은 일상인가.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고 정식으로 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일본어 공부삼아 내가 하고 싶어서 번역하는 재미에 푹 빠져 시작한 책이 바로 소노 아야코(曽野綾子)의『계로록(戒老録)』이었다.


훗날 서투른 내 번역 원고를 보시고 이런 저런 우여곡절 끝에(이현기 교수님과 공역으로) 출판사에 다리를 놓아 주신 분도 다름 아닌 박경자 선생님이다. 이렇게 해서 나의 처녀작『100년의 인생, 또 다른 날들의 시작』은 1998년 영풍문고에서 출간되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박경자 선생님의 배려와 사랑이 없었더라면 감히 출판은 엄두조차 못 낼 일이었다.


소노 아야코(曽野綾子)의『계로록(戒老録)』번역을 처음부터 다시 손보고 새롭게 다듬어 2004년에 도서출판 리수에서 개정판으로 출간한 책이『나는 이렇게 나이들고 싶다』이다. 이 책은 근 십여 년 이상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내 대표작이기도 하다.


아무튼 나의 첫 번역서『100년의 인생, 또 다른 날들의 시작』을 분기점으로 제목처럼 내 인생에도 또 다른 날들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번역 책을 출간하면서 그와 동시에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일어전공 석사과정에 진학하였다. 대학원 입학도 전적으로 박경자 선생님의 진심어린 이 한 마디 격려말씀 덕분이었다. 

“일본에서 5년씩이나 살면서 애써 익힌 일본어가 아깝기도 하거니와… 내가 볼 땐 네가 일본어를 곧잘 하는 것 같기는 한데 이왕 배운 것 정식으로 대학원에 진학해 일본어 공부를 제대로 한 번 해보는 것도 좋을 듯싶은데…네 생각은 어떠니?”


일본에서 귀국 후 한 동안 마음을 잡지 못하며 허전함을 크게 느꼈던 것은 아마도 내 안에서 그만큼 많은 시도와 변화를 꿈꾸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생활 5년은 일본과 일본어, 일본인을 제대로 공부해 보고자하는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었고 나이 마흔 살에 대학원 석사과정 입학이라는 길고도 험난한 늦깎이 인생의 서막을 알리는 시작이었다.


우리는 스스로의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지만 주위 사람 도움 없이는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제대로 찾아 나아가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내게는 인생 고비 고비마다 등대 같은 존재였던 박경자 선생님의 과분한 인연 덕분에 지금 내가 여기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삶은 매순간 끝없이 갈라지고 이어지는 갈림길의 연속이다.

갈라지고 때론 이어지는 길목 길목마다 사소한 인연들이 숨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삶의 위로처럼 혹은 기적처럼.

우리의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크든 작든 눈에 보이지 않는 고마운 인연들로 가득 차있기 때문이리라.


(2015.4.15)

 

 

 


Posted by 오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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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첫 도전, 일본어 변론대회(辯論大會)

 

일본에 온 지 횟수로 2년째에 접어들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시간과 비례해 만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아이들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새로 만나는 일본인 엄마들, 또 동네 이웃이나 가끔 들르는 동네 라면집이나 소바가게 주인, 내가 사는 맨션의 집주인부터 관리인에 이르기까지 스스럼없이 대화를 주고받기에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구약소(区役所)에서 배우는 일본어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내가 말하고 듣고 전달해야하는 정보량을 커버할 수 있을 정도의 좀 더 수준 높은 일본어가 필요했고 이왕 일본에 온 이상 일본어 하나만큼은 제대로 하고 싶었다.

 

마침 우리 집에서 자전거로 5분 거리에 있는 그 당시엔 나름 꽤 규모도 갖춘 이스트웨스트 일본어학교(East West Japanese School)에 정식으로 등록을 마쳤다. 1993년 그 때만 해도 한국에서는 한창 일본어 붐이 일기 시작했고 그 영향에서인지 도쿄에는 한국인 유학생들이 참 많았다. 이스트웨스트 일본어학교는 일본대학이나 대학원 진학을 목표로 각 나라에서 유학 온 외국인 학생들이 일본 대학(원) 진학을 위해 입학 전 1년~2년 코스로 일본어뿐 아니라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을 이해하고 배울 수 있도록 다양한 커리큘럼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예상대로 학생들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듯한 이십대 초반이 대부분이었고 간혹 많아야 서른을 넘지 않은 듯 보이는 학생이 두어 명 정도였다. 우리 반은 스무 명, 거기서도 역시 내가 제일 나이가 많았다.


첫 시간 자기소개를 한 후 모두들 나를 언니, 누나로 불렀다. 오랜만에 들어본 호칭에 마냥 좋아하기에는 어쩐지 좀 어색하기도 했다. 수업은 오전 9시에 시작해 오후 2시에 끝났다. 하루 5시간씩 주 5일 강행군 수업이었다. 게다가 날마다 매 시간 수업 시작 전 전 날 배운 내용에 대해 시험도 봤다. 공부양도 많았지만 하루라도 예습 복습을 거르면 따라가기도 버거웠다. 매일 보는 시험과 중간시험, 기말시험 성적을 평가해 합격점을 통과해야 수료증이 나오고 이 수료증이 일본대학(원) 진학 시에 제출해야 하는 필수서류 중 한 가지라 했다.


사실 나야 대학 진학과 무관하니 이런 저런 시험에 그리 목을 매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만만치 않았던 수업료(그 당시 매월 6만 엔 정도)에 일단 일 년은 일본어에 죽기 살기로 매달려 보기로 작정한 이상 젊은 친구들과 똑같은 마음가짐으로 치열하게 부딪혀볼 수밖에 없었다.

일본어학교 등록 후 일상생활 중 가장 큰 변화는 아이들 위주였던 시간표를 내 위주로 다시 짜야했다.

여러 과목을 예습, 복습하고 날마다 치르는 시험공부도 하려면 우선 아이 둘을 가능한 한 일찍 재우고 공부할 시간을 확보하는 게 급선무였다.


특별한 일이 없는 경우는 저녁을 일찍 먹이고 늦어도 8시 반까지는 잠자리에 들게 했다. 그래야만 아이들이 잠 든 이후 시간은 일본어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일본어학교에서 5시간 수업에다 집에서 3시간 정도 하루 평균 8시간 정도 일본어 공부를 하면서 그 해 일 년간은 그야말로 일본어 공부에 올인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스트웨스트 일본어학교를 다닐 때 언어학습의 가장 기초가 되는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 일본어 공부를 가장 재미있게 열심히 하지 않았나 싶다. 생생한 일본문화 한 복판에서 일본인에 둘러싸여 일본 현지라는 최적의 환경에서 일본인 교사에게 일본어를 배우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지금으로부터 24년 전 1993년이니 말이다.


일본어 학교를 다니면서 당시 유치원 다니던 작은 아이의 대여섯 절친 엄마들에게 많은 신세를 졌다.

유치원 끝나는 시간이 일본어학교 수업 시간보다 훨씬 일러 유치원 끝나는 시간에 맞춰 아이를 데리러 갈 수가 없어 친구 엄마들에게 돌아가며 부탁하여 아이를 맡기곤 했다. 그 대신 일주일에 한번은 우리 집에 아이 친구들을 몽땅 데려와 마음껏 놀게 했다. 지금은 어엿한 청년이 된 료타로 군, 노부 군, 류이치 군, 야마다 군, 히로키 군, 마사토 군.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엄마들은 엄마들대로 지금도 이십여 년 이상 끈끈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일본어학교 하면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는 추억 하나가 있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 당시 그런 용기가 어디서 솟아나왔는지 통 알 수가 없다. 유학생 일본어 스피치대회에 나가 서른여섯 살 아줌마가 20대 유학생들 틈에서 우승을 하였다. 그런 대회가 있는 줄도 모랐지만 등 떠밀려 나가게 된 것은 순전히 일본어학교 모치쓰키 선생 덕분이었다.


나는 여태껏 그토록 열과 성을 다해 학생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진지하고도 자상하게 가르쳐주는 제대로 된 훌륭한 선생님을 만난 적이 없다. 땀을 뻘뻘 흘리며 목쉰 소리가 날 때까지 웃으면서 최선을 다해 알려주시던 모치쓰키 선생의 아름다운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1993년 10월 이스트웨스트 일본어학교 모치쓰키 선생 추천으로 미쓰비시 은행 국제재단이 주최한 제4회 유학생 변론대회(辯論大會)에 뭣도 모르고 참가하였다. 내가 준비한 변론대회 테마는 “일본의 수화 뉴스(日本の手話ニュース番組)”였다.


수화 뉴스는 NHK에서 매일 저녁 7시 50분에서 8시까지 10분 간 방송하였는데, 뉴스의 모든 내용이 자막으로 나오며 일본 한자마다 읽는 법까지 친절하게 덧붙여져 일본어 공부하기에 안성맞춤의 좋은 자료였다.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일본어 공부를 위해 늘 들으면서 공부한 터라 변론대회 주제를 정할 때 이것저것 망설일 것 없이 가장 먼저 떠오른 주제가 바로 “일본의 수화 뉴스(日本の手話ニュース番組)”였다.


아~ 그런데 이 게 무슨 일인가? 내가 우승을 하다니… 심사위원들 심사평 중 주제가 독특했다는 멘트가 한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게다가 참가자 중 가장 나이 많은 주부라는 이력도 동정심을 유발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일본에서 난생 처음 스피치대회 우승이라는 즐거운 경험을 하면서 부상으로 홋카이도 왕복 항공권도 받아 쥐고는 일본어 자신감도 그야말로 기세충천이었다. 최소한 스피치대회 우승 덕분에 홋카이도를 처음 여행하던 그 무렵까지는.

 

 

 

그 후로는 변론대회(辯論大會)하면 이스트웨스트 일본어학교 대표 주자로 은근히 나를 거론하는 분위기로 슬슬 바뀌었다. 그래서 내친 김에 그 해 12월 제9회 문부대신(文部大臣: 한국의 교육부장관) 장려 사단법인 일본우애청년협회(日本友愛靑年協會) 우애배쟁탈(友愛杯爭奪) 일본어 변론 전국대회에 다시 한 번 출전하게 되었다. 이 대회 변론 주제는 “내가 생각하는 자원봉사(私の考えるボランティア)”로 정했다.


그 당시 ‘토요스쿨(Saturday School)'이라는 나카노구(中野区)에 사는 일본인과 외국인 부모와 자식이 함께 참여하고 활동하는 소모임이 있었다. 일주일에 한번 토요일에 모여 자기 나라 문화를 소개하고 언어 공부도 하고 음식을 만들어 나눠먹거나 각국의 노래나 춤을 배우기도 했다. 또한 외국인으로 일본에 살면서 불편한 점이나 애로사항 등을 토로하며 도움을 청하기도 하며 자원봉사 활동도 겸했다. 요컨대 일본인 외국인 할 것 없이 상부상조하며 소통과 교감을 통해 함께 잘 살아가자는 작지만 의미 있는 독특한 지역모임이었다.


‘토요스쿨(Saturday School)'에는 눈이 안 보이거나 귀가 들리지 않거나 거동이 불편하여 휠체어를 타고 생활한다거나 몸의 이런 저런 부분이 불편한 장애아를 둔 일본인도 몇 분 참가하였다. 하루 종일 자신의 아이 돌보는 것만도 힘에 벅찰 텐데 이웃 장애아까지 하루 몇 시간씩 짬을 내 돌봐주는 자원봉사활동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 분들을 매주 만나 보고 듣고 느끼며 감동했던 순간들이 참 많았다. 그러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써 내려간 내용이 변론대회 주제가 된 “내가 생각하는 자원봉사”였다.


이 대회에서도 역시나 내가 제일 연장자였다. 결과는 참가상으로 끝났다. 일본인과 외국인이 동등하게 참가하는 예선전을 걸친 전국대회라 역시 쟁쟁한 참가자들이었다. 나보다도 더 많이 노력하고 더욱 절실한 참가자에게 우승이 돌아갔으리라 생각했다. 그렇다고 아주 쿨하게 전혀 아쉽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난 1993년 한 해 동안 내 생애 처음 일본어 변론대회에 두 번씩이나 도전을 했다. 남들이 볼 때 하찮고 별 볼일 없는 대회일지는 몰라도 일본어를 제대로 공부해보겠다고 마음먹은 지 일 년도 안 돼 그것도 일본에서 일본어로 일본인들과 나란히 경쟁을 펼치면서 얻어낸 자산 중 한 가지를 꼽으라면 값을 매길 수 없는 어마어마한 소중한 자신감이었다.

 

        

 

 

대회 당일 하루 종일 우리 작은 아이를 맡아주며 결과를 기다리던 절친 엄마들 또한 덩달아 분주하게 움직이며 케이크를 준비하는 등 축하파티를 계획했다고 한다.

“오이와이(お祝い:축하) 파티가 오시이(惜しい: 애석한) 파티”가 되었다면서도

“오상~ 스고이(すごい:대단하다). 스고이”를 연발했다.


진정 행복이란 늘 내 곁에 미소 짓는 그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이리라.

자신감 외에 일본인 친구들의 의리도 함께 빛난 그야말로 금상첨화의 행복한 시간이었다.

(2015.4.7)

Posted by 오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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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바쁜 삶을 사는 사람이 가장 많은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살면서 뚜렷한 목표가 있고 꿈이 있어 지치는 줄 모르도록 바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인생인가.

 

나의 서른 중반 일상의 일탈, 삶의 규범 변경과도 같은 일본 생활 분투기는 드디어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지금 이 나이라면 감히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무모한 결정 ‘일본에서 살아보기’는 ‘일본어 반쯤정복(?)’이라는 덤과 함께 훗날 나의 삶의 지도를 다시 그리게 되는 실마리가 될 줄은 그 땐 몰랐다.

 

5년간의 일본 생활은 나의 안목과 사고에도 긍정의 힘을 심어주었다.

나의 내일은 분명 풍성해지리라는 믿음과 신념이 자연스레 생겨났고, 꿈을 품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다 보면 다양한 모습의 새로운 기회와 기적이 한번쯤은

내게도 말을 걸어올 것이란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살이기에 휘둘리지 않을 자신만의 꿈이 있어야 한다. 꿈이 있는 현실이 보다 더 적극적이고 희망적이며 탄탄한 삶이다.

 

1996년 11월 늦가을 일본을 떠나오면서 그 동안 정든 이웃과 지인과 친구들에게 감사 편지를 보내며 드디어 길고도 짧았던 일본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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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떨구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왈칵 쏟아질 것 같은 뜨거운 눈물을 삼키며

하늘을 바라다보면서 정말로 나에게는 과분했던 5년간의 도쿄생활을 돌아다봅니다.

인생은 작은 인연들로 아름다운 것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 떠오르는 당신의 얼굴.

오늘 유난히도 별이 많은 이즈(伊豆)의 노을 진 홋카와온천(北川温泉)에 와있습니다.

늦도록 밤바다의 파도소리를 들으면서

당신과 함께했던 멋진 시간들은 또 하나의 별이 되어 쏟아져 내립니다.

내 가슴에 내린 당신의 별들은 보물(宝物)이 되어 두고두고 그리워질 것입니다.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이즈(伊豆) 홋카와온천(北川温泉)

 

(2015.4.6)

Posted by 오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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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순간의 우연한 만남이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수가 있지

 그런 멋진 만남을 … 」

 

「そのときの出逢いが

その人の人生を根底から変えることがある

よき出逢いを … 」

 

 

 

 나와 아이다 미쓰오(相田みつを) 선생과의 첫 만남은 1997년 3월 NHK 위성방송「말에 용기를 얻어 ‘아이다 미쓰오 ․ 인생의 응원가’ (ことばにいかされて ‘相田みつを․人生の応援歌’)」란 프로그램을 우연히 보게 되면서였고, 한 시간 내내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그날의 감동이 아직도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다.

 

방송을 본 후, 아이다 미쓰오 선생의 말과 글을 생각하며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던 어느날, 신주쿠(新宿)의 ‘기라쿠(きらく)’ 스시집 주인인 안도(安藤) 씨로부터 아이다 미쓰오 선생의『오직 한 길 오직 한가지 일(いちずに一本道 いちずに一ッ事)』이란 책을 선물 받았다.

 

또 그로부터 얼마 후, 일본인 친구 다카하라(高原) 씨에게서『행복은 언제나(しあわせはいつも)』란 책을

건네받으면서 아이다 미쓰오 선생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그해 여름 긴자(銀座)의 아이다 미쓰오 미술관을 찾아가, 전시된 작품들을 직접 둘러보면서 아이다

미쓰오 선생의 살아 숨 쉬는 듯한 숨결과 잔잔한 감동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아이다 미쓰오 미술관은 2003년 긴자에서 도쿄역 국제포럼 빌딩으로 이전하였다.)

 

넓은 미술관 내부는 은은한 조명과 부드러운 음악이 잘 어우러져 도심의 오아시스다운 그런 차분하고 편안한 분위기였다.

『지금 여기(いまここ)』란 시집이 영역본『THE HERE AND NOW』로 이미 출간되어 있었다. 영역본을 보는 순간, 이렇게 아름답고 멋진 글들을 우리나라에서도 누군가 번역한다면 좋을텐데… 하는 막연한 생각을 했었다.

 

살아가면서 ‘설마’ 했던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경우가 있다. 열세 권 남짓한 아이다 미쓰오 선생의 책을

읽어가면서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특히 마음에 와 닿았던 구절들을 하나하나 번역 해 나갔다. 단지 그저 내가 좋아서였다. 아이다 미쓰오 선생의 말 한 마디 한 마디, 글자 하나하나가 무엇보다도 내게 절실하게 다가왔으며 바로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듯한 위로와 위안의 목소리처럼 느껴졌다.

 

그러는 동안 또 몇 해가 흘렀다. 언젠가 볼일이 있어 출판사에 들렀다가 아이다 미쓰오 선생의 글에 대해

지나가는 말로 가볍게 소개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설마’ 했던 번역 기회가 내게 주어졌다.

 

서예가이자 시인으로서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자신만의 글과 말을 탐구해온 아이다 미쓰오 선생은 전시와 전후 동란기의 청춘시대를 보내면서 ‘생명’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하면서 많은 작품을 내놓았다. 특히 1984년에 출판된『사람이니까(にんげんだもの)』와『평생감동 평생청춘

(一生感動 一生青春)』은 밀리언셀러가 되었으며 지금도 남녀를 막론하고 어린아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두터운 지지를 얻고 있다.

 

아이다 미쓰오 선생의 글들은 쉬워서 얼핏 읽으면 바로 이해가 되지만 … 그러나 찬찬히 곱씹어보면 또 대단히 난해하다.

내면의 의미가 너무도 깊고 깊어 평생을 걸쳐서도 내가 그렇게 행할 수 없는 말들이 대부분이다.

아이다 미쓰오 선생의 글을 읽는 순간, 그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유니크한 서체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고 쉽게 써내려간 글들의 심오한 의미에 다시 한 번 매료된다.

 

◇ 평생감동 평생청춘 (一生感動 一生青春)

 

여든이 넘어도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사람의 모습은 감동적이다.

몇 살이 되 든 감동, 감격하지 않으면 살아 있는 게 아니다.

날마다 끊임없이 무엇인가에 감동하며 가슴 설레는 것, 나는 그것을 청춘이라 부른다.

 

 

◇ 평생공부 평생청춘 (一生勉強 一生青春)

 

 

 

 

  ◇ 지금, 여기 그리고 나자신, 이 세 가지 합이 나의 인생

 

 

 

◇ 행복은 언제나 나의 마음 속에 있는 것

 

 

 

만남 (めぐりあい)

 

당신을 만날 수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요.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 길(道)

 

  내 길은 내가 만들고

  내 길은 내가 펼쳐나간다

  다른 사람이 만든 길은

  내 길이 될 수 없지

 

 

아주 쉽고 누구나 다 공감할 수 있는 평범한 말투로 인간 아이다 미쓰오 선생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꾸밈없이 자연스럽게 표현한 시들은 읽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며 각박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에 때로는 차분하게 타이르며, 때로는 힘차게 격려하면서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특히 요즈음처럼 여유 없이 분주하고 고달픈 생활을 하는 많은 이들이 아이다 미쓰오 선생의 말과 글을 접하게 된다면 많은 위안과 용기를 얻게 되어, 녹록치 않은 일상일지라도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꿋꿋하게 자신의 삶을 지탱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아이다 미쓰오 선생은 떠났어도(1991년 서거) 그의 시는 변함없이 많은 이의 마음에서 마음으로 읽혀지며

늘 새로운 사랑과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2015. 3. 30)

 

  

** 사진 출처는 아이다 미쓰오(相田みつを) 선생 작품『生きていてよかった』의 한국어 번역본『덕분

   에』(오경순 옮김, 리수출판사, 2003년)와 구글 이미지(Google Image)에서 발췌했음을 밝힌다.


Posted by 오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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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를 정확히 1991년에 처음 시작했으니 사계절이 바뀐 횟수만 세어도 올해로 스물여섯 번째다.

게다가 아예 일본에 주거지를 옮겨 먹고 자며 떠들며 일본인들 속에서 생활한 기간만도 약 6년 정도가 된다. 어디 이것뿐인가? 석사과정에서 일본어교육을 전공하고 일본어학 박사까지 했다. 또한 일본 무사시대학에서 객원연구원 생활도 꼬박 1년이나 했다. 게다가 대학에서 일본어 관련 강의를 한 경력도 올해로 17년째에 접어든다.

 

뒤돌아보면 1991년 이후 줄곧 일본어와 함께 호흡하고 생활하며 또 일본어 덕분에 먹고 살고 있다.

일본어 공부를 게을리 한 것도 아닌데… 때론 일본어 원서 한 권을 통째로 외우다시피 하며 번역까지 하면서 일본어를 손에 놓지 않고 사는 데도 일본어는 정말 어렵다.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어렵다.

 

일본어가 한국인들이 배우기 쉬운 언어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오죽하면 영어권 화자들에게 가장 배우기 어려운 언어 5가지를 꼽았을 때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가 나란히 들어갈까? 역시 한자가 문제는 문제인 듯하다.

 

한국어와 일본어는 언어 구조상 유사한 점도 많지만 차이점도 많다. 같은 한자 문화권이라는 커다란 공통점도 있으나 한 ․ 일 양 언어가 유사하다는 선입관 때문에 오히려 한국인 일본어 학습자들은 한 ․ 일 양 언어의 문법 구조와 어법, 화용적 특징, 관용어법, 맥락 등을 간과해버리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이러한 오류는 단지 일본어 습득뿐 아니라 애써 익힌 일본어를 실생활에 제대로 활용, 응용하며 진가를 발휘해야 할 중요한 순간에 빛을 잃기 일쑤다.

 

예를 들어 한국어로는 달랑 한 문장인 ‘봄이 왔다’라는 가장 기본적인 단문도 일본어로 표기하자면 여덟까지 이상이나 된다. 물론 ①번, ②번처럼 한자와 히라가나를 혼용하는 경우가 가장 일반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외 표현들이 일본어로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다.

 

① 春が来た。

② 春がきた。

③ はるが来た。

④ はるがきた。

⑤ 春がキタ。

⑥ ハルが来た。

⑦ ハルがきた。

⑧ ハルガキタ。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일본어의 큰 특징 중의 한 가지가 또 있다. ‘봄이 왔다’를 일본어로 말할 때 일본인이라면 십중팔구 ‘春が来た。(봄이 왔다)’보다는 ‘春になった。(봄이 되었다)’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요컨대 ‘春が来た。’보다는 ‘春になった。’가 훨씬 일본어다운 표현이라는 말이다. 우리말처럼 문장의 주어나 주체를 내세워 주어나 주체가 한 행위나 동작을 드러내기 보다는 피동형처럼 상황을 묘사하는 표현을 선호하는 것도 일본어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이다.

 

특히 일본어에는 ‘고토다마(言霊)’라 하여 말 속에 '혼‘이 깃들어 있다고들 한다.

예를 들면 일본어에 ‘호메고로시(褒め殺し)’란 말이 있다. 칭찬하다는 뜻의 ‘호메루’와 죽이다는 뜻의

 ‘고로스’를 합친 복합명사이다.

‘호메고로시’란 실제 이상으로 칭찬하여 상대를 불리한 상황에 빠지게 하거나 의욕을 잃게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호메고로시’가 상대를 치켜세우는 일인지 궁지로 몰아넣는 일인지 끝까지 들어보지 않고서는

진의를 파악할 수가 없다.

 

또한 일본어에 ‘도오리마(通り魔)’가 있는데 ‘만나는 사람에게 재해를 끼치고는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길거리 악마’라는 뜻이다. 소위 ‘묻지마 살인 사건’처럼 어느 순간 가해자에게 마(魔)가 끼어 사람을 해친다는 말인데 얼핏 보면 가해자나 피해자나 양쪽 모두 피해자처럼 취급하는 듯 하는 참으로 모호한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2008년 도쿄 아키하바라 대로에서 트럭을 몰고 불특정 다수 행인들을 치며 묻지마 살인을 저지른

일명 ‘아키하바라 도오리마’사건이 일어났을 때 일본사회 일각에서 ‘도오리마’라는 일본말 자체를 없애버려야 한다는 움직임도 일었다.

 

역시 한 가지 언어를 터득하려면 단지 언어 자체만의 시야에서 벗어나서 그 나라의 정치, 경제, 역사, 문화, 문학, 의식구조, 언어감각 등 그 언어를 둘러싼 배경지식이 없으면 그 언어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도 없고 전달할 수도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국인에게 일본어 습득이 어려운 요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리 한자음으로는 항상 똑 같이 한 가지로 발음하는 한자가 일본어에서는 음독이나 훈독 혹은 예외로 독특하게 읽는 등 일본 한자 읽기가 가장 까다롭고 어렵다고들 한다. 한 예로 한자 ‘生’은 우리 한자음으로는 ‘생’ 하나이지만, 일본 한자음으로 읽게 되면 수십 가지나 된다.

 

그런데 일본 한자 읽기가 일본인한테도 어려운 모양이다. 오죽하면 아소타로(麻生太郎) 전 일본 총리를

‘KY히토(人)’라 하며 비아냥거렸겠는가? 공식 석상에서 참모진들이 미리 작성해준 원고를 읽어내려 가면서도 한자를 종종 틀리게 읽는 아소타로 총리를 빗대어 ‘한자를 읽지 못하는 사람’ 이라는 일본어

 ‘漢字(Kanzi)が読めない(Yomenai)人’를 줄여서 ‘KY人(케이와이히토)’라며 깎아내렸다.

 

또한 복잡하고 다양한 일본어 경어체계 숙달도 만만치 않고 한국어로 번역이 불가능한 사동피동 표현 등

사동형과 피동형 표현이 많은 것도 한국인 학습자가 애를 먹는 요인 중 하나이다.

 

한국어와 일본어가 유사한 탓에 오히려 헷갈리며 자칫 틀리기 쉬운 표현 예를 하나 들어본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주고받는 기분 좋은 일본어 인사말 중에 이러한 표현이 있다.

 

あなたにお会いできて大変栄光です。(당신을 만나 뵙게 되어 대단히 영광입니다.)

그런데 이 일본어 문장은 옳은 표현일까?

 

우리말 ‘영광’에 해당하는 일본어는【栄光】가 아니라【光栄】이다.

일본어 전공자라 할지라도 일본어 작문이나 한일 번역을 할 때 자칫 오류를 범하기 쉬운

표현 중 한 가지이다.

인터넷 번역기에 넣어 봐도 우리말 ‘영광’에 해당하는 일본어는 영락없이【栄光】으로 번역되니 주의해야

한다. 

또한 손윗사람을 만났을 때 자신을 낮추며 격식을 차린 다음 인사말도 마찬가지이다.

お目にかかれて光栄に存じます。(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러면 우리말 ‘영광’에 해당하는 일본어는 무조건【光栄】이고, 일본어에【栄光】이란 말은 아예 없을까?

한국인 일본어 학습자가 자주 오류를 범하는 함정이 바로 이 대목이다.

 

한국어로 ‘영광’과 ‘광영’은 모두 ‘아름답게 빛나는 영예’를 뜻하는 같은 말이다.

그러나 일본어에도【栄光】과【光栄】은 있으나 양쪽의 의미가 다르니 정확히 가려 써야 한다.

일본어【栄光】는 ‘커다란 명예(大きな名誉)’를 뜻한다. 즉 ‘난관을 극복하고 보통 사람들은 감당해 내기

어려운 일이나 임무를 끝까지 완수하고 이루어낸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예를 들어 ‘그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의 영광을 손에 넣었다. (彼はオリンピックで金メダルの栄光を手にいれた。)’ 의 경우처럼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도달하기 어려운 힘든 목표를 달성한 이러한 경우에 쓸 수 있는 적격인 일본어 표현이 바로【栄光】이다.

 

그러므로 극히 한정된 위와 같은 경우가 아니라면 한국어 ‘영광’과 ‘광영’에 해당하는 일본어는

【光栄】으로 염두하고 아래처럼 말하거나 쓰면 거의 틀림없다.

 

제가 만든 요리를 잡수셔서 영광입니다.

私の作った料理を食べてもらって光栄です。

 

일본어 문법을 착실하게 공부한 사람일수록 실수를 범하기 쉬운 일본어 표현 예를 한 가지 더 들어본다.

일본어 회화에서 많이 쓰는 표현 중 ‘거짓말하다【嘘をつく】와 거짓말마라【嘘をつけ】’ 가 있다.

그런데 일본어 ‘거짓말하다【嘘をつく】’의 명령형인【嘘をつけ】는 문법적으로 따지면 ‘거짓말해라’

라고 하는 정반대의 의미가 되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거짓말 마라! 혹은 거짓말쟁이’의 뜻으로 쓰인다.

왜 그럴까?

 

‘거짓말하다嘘をつく】’ 의 금지를 나타내는 표현이 ‘거짓말 하지마라【嘘をつくな】’인데 강조하는

의미로【嘘をつけ】를 거짓말쟁이의 의미로 사용했고, 여기서【嘘をつけ】는 발화의 기능 중 명령의

기능이 아닌 상대를 비난하는 기능으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거짓말쟁이【嘘をつけ】’는 일본어 문법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지만, 일상생활에서 흔히

사용하는 표현이므로 일본어 학습자들은 특히 주의를 기울여 익힐 필요가 있다.

 

아무튼 한 ․ 일 양 언어의 유사성과 모어 간섭 탓에 한국인 일본어 학습자가 자칫 틀리기 쉽고 헷갈리기

쉬운 일본어 표현을 정리하자면 족히 책 몇 권은 될 듯싶다.

(2015.3.25)

 

Posted by 오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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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를 뜻하는 프랑스어 ‘바캉스(vacance)’의 어원은 라틴어로 ‘빈자리’나 ‘공허함’을

뜻하는 ‘바누스(vanus)’ 혹은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지다’를 의미하는 ‘바카티오(vacatio)’

이다.

요컨대 반복되는 일상의 따분함과 텅 빈 마음에서 벗어나 새로운 내일을 살아가기 위해 인생에 활력, 신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는 진정한 자유(freedom)를 만끽하는 의미이리라.

 

우리 인생에도 굵직굵직한 큰 줄기의 ‘바캉스(vacance)’가 필요하다.

쉼 없이 시간에 떼밀려 살아오면서 지나쳐버린 길, 놓쳐버린 길에 미련과 후회와 아쉬움은

없는지 한번쯤 돌아다볼 인생의 휴가가 필요하다.

 

나 역시 가지 않은 길, 새로운 세상을 향해 모험과 도전을 강행하며 인생을 재충전했던

진정한 자유, ‘바캉스(vacance)’를 만끽한 시기가 정확히 내 나이 35세였다.

내 인생의 첫 번째 전환기였다.

 

 

 

 


                   『35세를 위한 체크리스트』:  ‘나의 35세' 인터뷰                                                    

     

‘뜻밖의 고개’가 인생을 풍요롭게 만든다

 

 

  학교를 졸업한다고 곧바로 취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간 어렵지 않다. 설령 직업을 얻었다 해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동료 혹은 선후배와도 치열한 자리싸움을 벌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소위 ‘철밥통’이라 불리는 공무원, 그중에서도 안정적이고 성취도도 높은 ‘선생님’이 된다면? 정년퇴임할 때까지 쭉 하는 게 인지상정이지 않을까. 하지만 오경순 교수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사실 운이 좋은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사범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하자마자 한 사립고등학교 선생님으로 부임한 것이다. 당시 스물세 살의 아가씨였던 그녀는 권위적이기 보다 친구 같은 선생님으로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활발한 성격에 붙임성 또한 좋은 편이었다. 학교 행사를 때마다 앞장서다 보니 동료 교사들의 사이도 돈독했다.

  20대 후반에 결혼을 했다. 평범하지만 순탄한 가정이었고 곧 두 명의 아이들이 태어났다.

화려하지 않아도 누구의 삶도 부럽지 않을 만큼 모든 것은 순조로웠다.

 

  하지만 오경순 교수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평화로운 일상 도중에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을 만큼 답답함이 몰려오곤 했었다.

  “교사가 된지 5년쯤 지났을 때 처음으로 직장에 대한 회의감을 느꼈어요. 학생들에게 매년

똑같은 것들을 가르치는 게 따분했어요. 학부에서 4년 동안 배운 내용으로 수십 년을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도 뭔가 부끄러웠죠. 그렇게 꾸역꾸역 버티고 있는데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애들 아빠가 회사에서 해외 파견근무를 제의받았거든요. 학창시절 영어를 배우는 재미가

쏠쏠해 영어선생님이 된 것처럼 그 시절로 돌아가 뭔가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싶었어요. 그 열망이 11년간의 교직생활을 정리하고 일본행을 택할 만큼 강했습니다.”

 

  1991년 늦가을 일본 도쿄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그녀는 “당시만 해도 일상생활에서 영어로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은 특별한 경우 외에는 매우 드문 일이라 하루빨리 일본어를 익히는 게 급선무였다”고 회상한다. 외국인거주자가 그리 많지 않던 시대였다. 뒤늦게 선택한 일본행이었고 나이가 있다 보니 배우는 속도가 좀처럼 오르지 않았다.

  각각 여섯 살과 세 살이던 아이들이 당장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다녀야 했기에 엄마로서도

하루빨리 언어를 습득해야만 했다. 아이들의 선생님과도 의사소통할 일이 생겼다.

또 일본에서는 부모가 아이의 유치원 등하교를 전담하기 때문에 같은 유치원에 다니는 자녀를 둔 엄마들과 함께 그 길을 오갔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반드시 일본어를 깨쳐야 했다.

 

  오전에는 지역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무료 일본어 교실을 다니고 오후에는 아이들이 가져온 연락장(선생님과 학부모 간 소통을 위한 알림장)을 공부삼아 서툰 일본어라도 선생님의 물음에 성심성의껏 답했다. 10년 넘게 학생들을 가르치다 직접 의자에 앉아 열심히 공부하다 보니 학생이 된 것 같아 마냥 즐거웠다.

  그렇게 1년이 지나자 일상생활을 하는데 불편함이 사라졌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욕심이 생겨났다. 그렇게 대학교 랭귀지스쿨에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엔 한국에서 유학 온 학생들을 따라가기 위해 치열하게 공부 했고, 그 사이 일본어 실력이 눈에 띄게 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의 순간이 찾아왔다.

 

  “학부시절 은사님이 와세다대 교환교수로 오셨는데, 일본에 사는 제 회화 실력이 학생들보다 조금 낫다고 생각하셨는지 통역을 부탁하셨죠. 하루는 교수님께서 책 한권을 주시며 번역을 맡기셨어요. 저를 좋게 봐주시는 것이 기뻤고 도전해보고 싶어 나름대로 열심히 번역했죠. 작업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신 교수님께 번역원고를 건네 드렸어요. 그러자 이번엔 책으로 내보자고’ 하시더라고요. 그 책이 제 첫 번역서 소노 아야코의『나는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였어요.”

 

  그녀의 서른다섯은 어땠을까?

  “사람들은 인생을 고개에 비유합니다.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다고들 말하죠. 하지만 늘 완만한 것은 아니에요. 살다 보면 ‘뜻밖의 고개’를 만나게 됩니다. 이 고개는 아무에게나 찾아오지 않습니다. 평소 관심이 있고 흥미로워하는 분야에서 만나게 되지요. 뜻밖의 고개를 경험할수록, 그리고 자주 만날수록 인생은 더욱 풍요로워 지는 겁니다.

  저의 뜻밖의 고개는 삼십대 중반이었습니다. 언어에 대한 동경으로 무턱대고 일본으로 떠난 시기였죠. 하지만 그게 시발점이 되어 옛 은사를 만났고, 그 인연으로 지금 이 순간까지 왔다고 생각해요. 다들 제가 무모하다고들 하지만 저는 후회하지 않아요. 이제 막 즐거운 인생 2막이 시작됐으니까요.”

 

  30대 중반부터 시작한 일본어. 일본인 틈바구니 속에서 직접 몸으로 부딪히고 배웠던 경험은 ‘일본어를 살아 숨 쉬는 언어로 제대로 번역해보고 싶다’는 소망으로 발전했다. 새로운 도전에는 그녀의 생각을 지지하는 든든한 지원자들이 버팁목이 되어 주었다.

  오경순 교수는 마흔 한 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고려대학교 일본어교육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그때까지도 교수를 해야겠다는 목표보다는 좋아하는 번역 좀 더 잘하고자 하는 바람이 컸었다. 그녀의 자신은 공부에 대한 열정과 성실함이었다.

 

  이 태도가 다시 한 번 빛을 발했다. 석사학위는 박사를 취득하기 위한 과정처럼 느껴졌고,

여기서 멈추면 큰 의미가 없다고 판단해 결국 박사과정까지 밟게 된다. 안정적인 교사직을

포기하고 매 순간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달려오면서 일본어에 발을 들여놓은 지 17년

만에 취득한 박사학위였다.

  지금 오경순 교수는 세종대학교에서 일어일문학을 가르치며 진실한 보람을 느끼고 있다.

고등학교 교사 시절처럼 입시준비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친자식 같은 학생들에게 앞으로의

인생을 위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위주로 강의한다. 학생들의 황금 같은 청춘을 허투루

보내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미래가 불안해 잠 못 이루는 젊은이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다.

  “우리는 꿈을 가져야 한다고 하면 반드시 무언가 이루어야 하는 것들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다 보니 꿈을 이루지 못했을 때 상대적으로 좌절감이 크게 다가옵니다. 우선 적당한 크기의 꿈을 가지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꿈이라는 게 성취의 유무에 따라 가치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꿈을 갖고 열심히 살았던 매 순간 순간들이 진정 가치 있는 삶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혹시 인생의 길목에서 찾아오는 작은 고개를 오르기가 힘들다면 주변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 함께 넘도록 해요. 도움을 준 이들을 꼭 기억하고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게 중요하지요. 언제고 상대가 도움이 필요할 때는 자신이 도움 받았듯이 되돌려 주면 되는 겁니다.

따로 또 같이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평소 인간관계에 소홀하지 말고 인연을

소중히 여기라고 당부하고 싶네요.”

 

(2015.2.13)

 

 

 

Posted by 오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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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는 혈연, 학연, 지연이 아닌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개인의 덕망이 최고의 능력으로 평가받는다.

혈연, 학연, 지연에 연연하면 자신을 차별화 할 수 없고 자신만의 소리를 내기 어렵다. 멀리 보고 오래 그리고 길게 가기 위해서는 나만의 아집이나 에고이즘 따위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타인을 배려하고 양보하는 마음의 그릇을 크게 가져야 한다.

요컨대 탈혈연(脫血緣), 탈지연(脫地緣), 탈학연(脫學緣), 탈아(脫我), 탈아집(脱我執),

탈독단(脫獨斷) 등의 능력이 개인의 품격과 도량, 가치로 고평가되는 사회다.


또한 날마다 새롭게 변화하는 사회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도 지금까지의 낡은 사고와 태도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새롭게 탈바꿈해야한다. 내 마음가짐부터 탈화(脫化)해야 한다. 좋은 샘은 언제나 새로움과 싱싱한 생명력으로 넘쳐흐르듯 우리의 마음도 늘 변화와 희망으로 넘쳐나야 생명 가득 아름답다.

세상이란 변화와 새로움으로 출렁거리는 파도를 따로 또 같이 타고 넘는 망망대해다.

혼자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일촉즉발 연속의 항해길이다.

잊지 말자. 배려가 가장 큰 미덕이다.


현대사회에서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개인의 경쟁력이다.

‘How(커뮤니케이션 방법)'보다는 ’What(커뮤니케이션 내용)'이 중요하다.

경쟁력 있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이 역시 개인의 사고와 정보와 논리의 차별성이 우선시된다. 남들도 다 하는 방식, 남들도 다 아는 내용, 남들과 똑같은 생각과 주장은 불순한 산물인 스팸메일처럼 곧바로 걸러지고 영구 삭제되는 공해와도 같다.


이단(異端)’이라는 말을 아는가? ‘이단’은 그리스어로 ‘heretic’이라고 한다. ‘heretic’의 어원은 “선택할 수 있는” 뜻이라고 한다. 즉 다른 의견을 선택한 사람일 뿐이라는 뜻이다. 천편일률적으로 좌우 이념이나 진보 보수 논리만으로 편향되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악성종양으로 뿌리내려 건강하지 못한 사회가 되기 쉽다. 건강하고 품격 있는 사회가 되려면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고 남들과 다른 주장을 펼 수 있는 용기 있는 ‘이단(異端)’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사회가 ‘이단’을 귀담아 듣고 보듬어 안는 도량과 배려가 필요하다.


외국을 여행하는 것과 외국에서 생활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기회가 된다면 외국에서 살아보는 것도 나름 꽤 가치가 있다. 내가 사는 세상과 전혀 다른 문화와 풍경 속에서 색다른 경험을 하면서 나를 돌아다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기도 하다. 이문화(異文化)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은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안목으로 이어진다.


딴 세상 뒷골목을 서성거리며 동네 허름한 작은 카페에도 들어가 보고 땀 흘리며 일하는 이와 눈도 마주치며 미소도 지어보이며 낯선 도시의 맨 얼굴을 내 눈으로 직접 들여다보는 것은 의외로 흥미롭고 배울 점이 많다. 현지인과 뒤엉켜 살면서 때론 실수도 하고 때론 도움을 청하기도 하면서 온몸으로 체험하는 생생한 이문화는 자신의 인생에 터닝 포인트가 되기도 하며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는데 두고두고 귀중한 자산이 된다.

이문화(異文化)에 대한 호기심과 배려가 필요한 시대다.


오늘날의 사회는 개인의 이채(異彩)롭고 이색(異色)적이고 이례(異例)적인 작은 차이를 중시한다.

대다수가 지나쳐버린 작은 차이가 세상을 뒤바꾼 예는 얼마든지 있다.

변화와 차별성은 늘 시행착오와 함께 다닌다. 실수와 실패의 끝자락에 비로소 변화와 창조가 보이기 시작한다. 일상과는 좀 더 다른 각도에서 보고 어제의 관점에서 약간 비켜나 생각하고 다양한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작은 차이에 무심하거나 나만의 차별성을 드러내지 못하면 변화와 창조는 없다.


한 시대의 패러다임을 바꾸어놓기도 하는 발상의 전환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개인의 작은 차이에서 비롯된다. 남들과 다르게 보고 듣고 말하는 작은 차이가 인생의 승패를 결정짓는 경우도 많다. 기억하자. 작은 세세함이 큰 차이를 만든다. 남들은 무심코 흘려 지나쳐버리는 것에서 작은 차이를 발견하고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능력이 다름 아닌 비전이다.


인생은 만남의 연속이다.

일기일회(一期一会)’는 다도(茶道)에 임하는 마음가짐에서 유래한 말로 '평생에 한번뿐인 만남, 일생에 한번뿐인 인연‘이라는 의미이다. 즉 당신과 내가 만나는 지금 이 순간은 일생일대 단 한번뿐인 귀한 만남이며 특별한 인연이므로 최선을 다해 최고로 극진하게 서로를 예우해야 한다는 말이다.

 

인생은 작은 인연의 연속이다.

우리 인생의 절반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과의 작은 인연들로 채워진다.

나를 둘러싼 울타리 넘어 바깥세상과의 인연, 즉 외연(外緣)을 가꾸고 귀하게 여겨야 한다.


삶의 길목에서 만나고 헤어지며 함께 웃고 울며 호흡했던 많은 이들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이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 평소 인간관계에 두루두루 마음을 쓰며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늘 감사와 칭찬이 넘쳐나는 외향(外向)적인 사람에게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어있다.

자신의 울타리를 뛰어넘는 외연(外緣)외향(外向)이 현실을 더 적극적이고 희망적이고 탄탄한 삶으로 만든다.

'초인(超人, superman)'이란 말은 괴테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사용했지만, 프리드리히 니체가《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에서 의미심장하게 사용한 말이다.

초인이란 우수한 잠재력을 지닌 어떤 사람이 완전히 자기 자신을 지배하고 자기의 고유한 가치를 발현할 때 드러난다고 한다. 이러한 가치는 내세가 아닌 현세의 삶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초인(超人), 超世(초세), 초령(超齡), 초월(超越), 초한계(超限界), 초극(超克), 초월(超越),

초일(超逸), 초탈(超脫) 등의 ‘超~’라는 말은 세속적인 욕망이나 일반적인 한계를 벗어나거나 뛰어넘어 자신만의 고유 가치를 창출해낸다는 공통의 의미가 있다.


우리가 마음을 모아 열정적으로 하는 일들은 결국 노력한 만큼 되돌아오는 부메랑과 같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이 나이에’라는 자기 한계, ‘미흡한 여건’ 따위의 자기변명으로는 제자리걸음뿐이다.

시련이나 역경, 한계를 넘어서고 이겨내는 방법은 결국 지금까지 자신의 경험과 학습, 경쟁과 도전, 몰입 등으로 다져진 내공이 쌓여야 가능한 일이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겠지만, 자신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믿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품고 살아가야한다. 그러면서 크고 작은 어려움과 자기 한계를 이겨낼 수 있는 잔 근육들을 평소 단련하여 단단하게 키워놓아야 값진 성장을 할 수 있다.

자신의 미래를 신뢰하는 강한 자신감은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다.


(2015. 2. 4) 



 

Posted by 오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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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일본어에 재미를 붙이고 나니 유치원 연락장이나 일본인 친구들과 날마다 수다 떠는 일본어 대화만으로는 일본어가 늘상 그 자리에 맴도는 느낌으로 성에 차지 않았다. 일본어를 좀 더 제대로 배워 다양하고 세세하게 나를 제대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래서 수소문 끝에 내게 안성맞춤인 게다가 무료로 일본어를 배울 수 있는 곳을 찾아냈다. 우리식으로 하면 구청인 일본 구약소(区役所)에서 그 구(区)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에게 일주일에 두 번 자원봉사자들이 일본어를 가르쳐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일본어뿐 아니라 절기마다 있는 일본문화나 일본 전국에서 일 년 내내 크고 작은 축제로 이어지는 마쓰리(祭り)나 기모노 입는 법, 오차(お茶)나 스시(寿司) 즐기는 법까지 실생활에 필요한 일본문화와 일본어를 함께 배울 수 있는 안성맞춤의 기회였다. 바로 나카노구(中野区)에 신청을 하고 드디어 일본어 공부를 위해 행동반경을 구약소까지 넓혀갔다.

 

일본어를 배우러 온 외국인들로 구약소 큰 홀이 꽉 찼다. 외국인 대여섯 명 씩 한 팀을 짰고 자원봉사자 선생님 한 분이 한 팀을 담당하였다. 나는 중국인과 싱가포르인 인도인 태국인 이렇게 한 팀이 되어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선생님께서 직접 제작한 교재로 기초일본어와 기초한자, 생활회화를 공부하고 날마다 시험도 치러가며 얼굴이 벌게지도록 집중하다 보면 어느 새 3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그 때 그런 집중력이 어디에서 생겨났는지…

 

구약소에서 마음으로 일본어를 가르쳐주신 자원봉사자 할머니 선생님의 반짝반짝 빛나던 열정과 눈빛이 지금도 생생하다. 지나고 보니 그 때 그 시간들은 선생님에게나 나에게나 새로운 내일을 위한 선택의 순간들 이었다.

 

여태껏 닥치는 대로 내 방식으로 해왔던 공부와는 다르게 기초일본어이기는 하지만 좀 더 체계가 잡혀가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일본어는 말하기와 쓰기가 전혀 다르다. 일본어 특유의 탁음이나 장음, 단음을 외국인이 구별하고 알아듣기까지는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일본어 공부 중 외국인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이 한자읽기이고 해도 해도 끝이 없을 것 같은 한자를 정확히 읽고 쓰는 것이 내게도 가장 힘들었고 지금도 가장 취약한 부분이다.

 

일본인 이름을 보더라도 같은 한자라도 읽는 방법이 다 제각각이다.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으면 전혀 다른 엉뚱한 이름을 대는 큰 무례를 범하기 쉽다. 오죽하면 일본인의 성과 이름은 일본인도 못 읽는다 하지 않는가.

 

우리는 한자를 음으로만 읽지만 일본어 한자는 음으로도 읽고 훈으로도 읽으며 혹은 음과 훈을 섞어 읽기도 한다. 특히 인명의 경우는 예외도 훨씬 많은 것 같다. 또한 우리와는 달리 숫자나 자연현상 등을 성과 이름으로 쓰는 경우도 흔하다.

 

‘오십(50)’은 일본어로 ‘五十’이고 ‘고주’로 읽는다. 그러나 인명의 경우 ‘五十嵐’은 ‘이가라시’, ‘이카라시’, ‘이소아라시’ 등으로 불린다. 2차 대전 당시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山本五十六’도 ‘야마모토 고주로쿠’가 아닌 ‘야마모토 이소로쿠’로 읽는다.


            

또한 ‘일 씨(一さん)’은 ‘이치 상’이 아니라 ‘니노마에(二の前)상’으로 읽는데 ‘2 앞의 숫자가 1’이라 하여 그리 불린다. 일본어 ‘니(二)’는 ‘2’, ‘노(の)’는 ‘의’, ‘마에(前)’는 ‘앞, 전’을 뜻한다. 우리말로 직역하면 ‘2의 앞 씨’가 된다.

 

‘십이월일일 씨(十二月一日さん)’은 ‘시와스 상’으로 읽는다.‘시와스(師走)’는 일본어로 ‘음력 12월 즉 음력섣달’을 뜻한다. 이 말도 우리말로 직역하면 ‘음력 섣달 씨’가 된다.

 

‘춘하추동 씨(春夏秋冬さん)’도 있다. 일 년에 춘하추동이 다 들어 있다고 해서 ‘히토토세 상’이라 읽는다. 일본어 ‘히토토세(一年)’는 일 년 한 해를 일컫는 말이다. 이 이름도 우리말로 직역하면 ‘일 년 한 해 씨’가 된다.

 

재미있는 예가 또 있다. 화장실은 일본어로 ‘오테아라이(御手洗)’라 한다. 일본 경제단체장이며 캐논회장인 ‘미타라이 후지오(御手洗 冨士夫)’ 씨의 성이 바로 화장실을 뜻하는 ‘미타라이(御手洗)’이다. 이 성(姓)도 우리말로 직역하면 ‘화장실 씨’가 된다. 그의 먼 조상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시중드는 일을 맡아했었는데 화장실 출입을 하거나 손을 씻을 일이 생기면 손 씻는 물을 대령하는 일을 했던 조상에게서 하사 받은 성이 ‘미타라이(御手洗)’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지금도 인명, 지명 등 일본어 한자읽기로 골머리 썩이는 예는 한도 끝도 없이 많다.

와세다 대학 일본어 교육센터에서 외국인 유학생들에게 일본어 교육을 담당하는 ‘川口義一’ 선생님이 계신다. 명함을 받았어도 직접 읽는 법을 물어보지 않으면 ‘가와구치 요시이치’로 읽기 쉽다. 그러나 선생님의 성함은 ‘가와구치 요시카즈’로 읽어야 맞다. ‘일(1)’을 뜻하는 일본어 ‘一’을 ‘이치’로 읽지 않고 ‘카즈’로 읽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래서 일본사람 명함에는 한자 위에 대부분 읽는 법이 별도로 기재되어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아 특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생(生)’은 우리 한자음 읽으면 ‘생’ 하나로 끝나지만 일본어의 경우는 음독이 3가지, 훈독이 9가지 음독, 훈독도 아닌 예외로 특별하게 읽는 경우가 무려 67가지나 된다. 그저 한숨만 나올 따름이다. 게다가 외국인이 한자 필순까지 제대로 배우려면 이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본다.

 

얼마 전 NHK에서 일본인도 읽기 어려운 희한한 성(姓)의 유래에 대해 소개하는 방송을 봤다. ‘약봉지(薬袋)’라는 성이 있는데 이를 ‘미나이’라고 읽는단다. 일본어 ‘미나이(見ない)’는 ‘보지 않다’의 뜻이다. ‘약봉지(薬袋) 씨’의 유래는 이렇다.

“옛날에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이라는 영주가 길을 가다 약 봉지를 떨어뜨렸는데 마을의 친절한 농부가 그 약봉지를 주워 신겐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러자 약 봉지의 약점(내용물)을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 신겐이 농부에게 “약봉지 안을 보았는가?”라고 묻자 “보지 않았습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안심한 신겐이 농부에게 ‘약봉지(薬袋)’라는 성을 하사했는데 이를 ‘미나이(보지 않았다)’라고 읽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약봉지(薬袋) 씨’, 즉 ‘보지 않았다 씨’가 생겨났다는 말이다.

 

 

 

 

오죽하면『일본어와 한국어(日本語と韓国語)』를 쓴 오노 도시아키(大野敏明)도 일본어 공부는 울면서 들어가서 울면서 나온다(泣いて入って泣いて出る)고 했을까?

 

정말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게 공부겠지만 욕심 내지 않고 오늘 하루하루의 작은 공부로 새로운 지혜와 작은 기쁨을 만끽한다면, 그리하여 차근차근 내공이 쌓여 흔들리지 않는 내 삶의 중심축으로 우뚝 서게 된다면, 그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너무 늦은 시작이란 없다.

시작은 언제 해도 늦지 않다.

백세 인생, 너무 늦은 시작이란 결코 없다.

시작한다면 바로 지금이다.

 

새로운 시작, 새로운 도전을 하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길이 열리고 새로운 인생이 펼쳐진다.

도전은 젊음의 특권이라지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언제나 새로운 도전이다.

천천히 가고 늦게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말고 가다가 멈추는 것을, 시작하지 아니한 것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지금부터 십년 후 또 어떤 흥미진진한 인생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설레는 마음으로 날마다의 작은 공부에 희망과 긍정의 주문을 건다.

 (2015.1.29)

Posted by 오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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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왕초보 시절 웃지 못 할 에피소드 하나


지역센터가 치킨센터로 둔갑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나는 나대로 일본생활에 적응하느라 정신없이 뛰어다니다보니 어느 새 일 년이란 시간이 훌쩍 지났다. 날마다 내가 만나고 차 마시며 인사하고 대화하는 상대가 온통 일본인인 덕분에 오며가며 들은 풍월도 있어 어느 정도는 일본어로 간단한 의사소통이 가능해졌다.


역시 조금이라도 알아야 관심도 가고 흥미도 생기는가보다. 한 마디 겨우 하던 인사말이 두 마디로 늘고 묻지도 않은 말을 내가 먼저 늘어놓고 내가 먼저 만나자고 전화하고 약속하는 일들이 많아지자 차츰 일본어가 재미있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내 엉터리 일본어로 주위 일본인 친구들을 당황스럽게 하거나 본의 아니게 폐를 끼친 일, 때론 모두를 한바탕 웃게 만든 사건들도 참 많았다. 그런 모든 일들은 나도 한번 잘해보겠다는 생각 하나로 부딪치기도 하고 엎어지기도 하며 이런저런 시행착오들을 거치면서 비로소 제대로 된 일본어로 자리잡아가기까지 귀한 비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이 세상에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는 일본어만큼은 왕초보이기 때문에 다소 실수를 하더라도 오히려 상대가 눈 감아 줄 수 있는 선까지는 아마추어의 특권을 최대한 누렸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에서 바자회를 열기로 했는데 일정을 짜느라 보호자들이 모여 회의를 하기로 했다.

유치원에는 비상연락망이 있었는데 긴급 모임이라든가 전체 연락 등 전달사항이 있는 경우는 정해진 순번대로 차질 없이 전화로 연락을 해야 했다.

그 날도 연락망이 돌고 있었고 내 앞 순번인 에리짱 엄마가 내게 전화를 걸어 아주 또박또박 천천히 연락사항을 전달해주었다.


“오늘 바자회 관련 모임이 있는데 장소는 근처 ‘치킨센터’에서 하기로 했으니 오후 3시까지 꼭 참석해 달라”는 요지였다. 에리짱 엄마는 몇 문장 되지도 않은 짧은 말을 무슨 뜻인지 이해했느냐며 재차 확인을 했고 나는 그 정도쯤이야 충분히 이해했노라며 걱정 말라며 웃으면서 전화를 끊었다. 유치원 근처에 유치원이 파하기를 기다리며 가끔 유치원 엄마들과 들러 담소를 나누던 ‘KFC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센터’ 라는 가게가 하나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내가 그 곳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한 십분 정도 일찌감치 먼저 가 기다렸다. 그런데 3시가 지나도 어느 한 사람 나타나지 않았다. 이십분 삼십분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그 때는 핸드폰도 없던 때라 집 전화 외에는 연락할 방법도 없었고 집에 전화를 건들 그 시간에 집에 있을 리도 만무했다. 그 때서야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하기는 했는데 도대체 뭐가 잘못됐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아 무척 난감했다.


그날 저녁 “무슨 일이 있었느냐, 온다더니 왜 나오지 않았느냐”며 에리짱 엄마가 다시 전화를 했다. 내가 제일 먼저 ‘KFC 치킨센터’에 갔었는데 아무도 없어 한참을 기다리다 되돌아왔다고 하자 에리짱 엄마가 웃으면서 ‘치킨센터’가 아니라 ‘치이키센터’였는데 자기가 잘못 전달한 것 같다며 미안하다며 오히려 내게 사과를 했다. 그제서야 뭐가 잘못 돌아갔고 내가 뭘 잘못한 것인지 눈치를 챘다.


지역(地域)을 일본어로 발음하면 ‘치이키’이고, 일본 동네마다 있는 '지역센터(地域センター)'를 일본어로 발음하면 ‘치이키센터’인데 나는 동네 지역센터인 ‘치이키센터’에 오라는 말을 ‘치킨센터’로 잘못 알아듣고 엉뚱하게 ‘KFC 치킨센터’에 가서 마냥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도 일본에 가면 동네 곳곳에 있는 '지역센터'를 지날 때마다 그 시절 ‘치킨센터’가 떠올라 혼자 피식 웃곤 한다. 그날 이후 일본어를 가르치면서 지역(地域)이란 말이 나오면 학생들에게 그 옛날 에피소드를 들려주며 ‘지역(地域)’의 일본어 발음 ‘치이키’만큼은 제대로 가르치려 자못 신경을 쓰게 된다.


한 가지 외국어를 익힌다는 것은 한 가지 세계관을 더 갖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그만큼 세계와 인생과 인간을 바라보는 생각의 폭이 두 배로 넓어지고 깊어진다는

말이다. 또한 한 가지 외국어를 마스터하면 또 다른 외국어를 마스터하기가 훨씬 빠르고 쉬워진다.


전 세계 언어는 6880여개쯤 된다고 하는데 각 언어마다 그들 고유의 문법구조와 어법, 화용적 특징, 관용어법 등 나름의 특수성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보편성도 당연히 존재한다. 요컨대 6880여개나 되는 전 세계 언어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이러한 언어의 보편성 덕분에 한 가지 언어를 마스터하게 되면 그간의 언어습득 경험과 학습효과로 또 한 가지 언어 습득은 자연히 수월하지 않겠는가.


나 역시 새로운 외국어, 일본어를 하나 더 익히면서 내 인생이 곱절 넓어지고 깊어지고 흥미진진해졌다.

나 홀로 맨땅에 헤딩식 일본어 공부를 하면서 백 프로 절절히 공감한 소중한 체험이다.

(2015.1.24) 

Posted by 오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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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노야마소학교(塔山小学校) 교장선생님의 비상호출과 바디랭기지

 

큰아이가 집근처 도노야마소학교(塔山小学校)에 입학했을 때다. 유치원을 6개월 정도 다니고 난 후라 딸아이는 유치원 친구들과는 어느 정도 의사소통은 가능했지만 또래 일본인 초등학교 입학생들에 비하면 언어도 그러하지만 낯선 환경에서 날마다 맞닥트리는 새로운 문화충돌 등 여러 면에서 미흡하고 마음이안 놓였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일본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경우라도 새로 입학하는 아이 당사자뿐 아니라 학부모들도 하루아침에 뒤바뀐 낯선 환경에 혹시 적응을 잘 할 수 있을까 걱정하고 긴장하기 마련인데… 하물며 어느 날 갑자기 부모 따라 일본에 건너와 6개월 만에 달랑 일곱 살 난 어린아이가 외국인이라곤 전혀 없는 일본 초등학교에 일본인 아이들과 나란히 입학하게 되었으니 불안하고 초조했을 심리상태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러나 사실 딸아이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 당시는 서툰 내 일본어 탓에 내가 더 불안하고 긴장한 나머지 우선 내 언어 문제가 급선무였기 때문에 딸 아이 심리상태를 운운할 겨를조차 없었다. 그날 입학식이 끝나고 우리나라 초등학교 입학식 풍경처럼 배정된 교실로 담임선생님 뒤를 쫓아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따라 들어갔다. 담임선생님과 입학생들과 학부모들의 공식적인 첫 상견례 분위기가 이어졌다. 첫 삼자대면이 끝나고 교실 문을 나서는데 나이 지긋한 남자 선생님께서 우리아이 이름을 부르면 나를 찾았다. 교장선생님의 비상호출이란다.


우리아이 성(姓)이 '이(李)'인데 처음 일본에 갔을 때 ‘이’라고 해도 되는 것을 ‘리’라고 발음했더니 그때부터 우리 아이 성은 ‘리’가 되어 ‘리상(リさん)’으로 불렸다. 우리 애들은 지금도 애초에 성(姓) ‘李’를 ‘이’로 하지 않고 ‘리’로 한 것에 불만이 많다. 중국사람 성에도 ‘이(李)’가 많다는데 일본에 거주하는 중국 사람들의 경우 이름의 성씨 ‘李’는 대개 ‘리’로 발음한다고 한다. 따라서 한자는 같은 모양이라도 ‘李’를 ‘리’라고 하면 중국인으로 착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아무튼 영문도 모른 채 우리 애와 나는 교장선생님이 기다리는 맞은 편 복도 쪽으로 다가갔다. 교장선생님 말씀이 무슨 내용인지 백 프로 이해하지도 못했지만 눈치로 알아차린 호출 요지는 대략 이랬다.

도노야마소학교(塔山小学校)에 여태껏 외국인이 입학한 적도 없고 한국인 입학생도 이번이 처음이다. 일본에 온 지도 얼마 안 되었다고 들었는데 수업을 따라갈 수 있을지 염려가 된다. 특히 1학년 신입생이고 학기 초라 학교에서 가정으로 보내는 통신문이나 연락사항 등도 많을 거고 수업이나 급식 관련 준비물 등 이것저것 많을 텐데… 이러한 모든 수업이나 학교행사 관련 일정을 모두 일본어로 공지할 텐데 ‘리상(李さん)’이 별 문제가 없는지, 그리고 ‘리상’의 어머니가 일본어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대응할 수 있는지를 파악하고 입학허가를 재고하고 싶다는 취지였다.


교장선생님의 말씀을 대충 이해는 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일본어가 서툴지만 앞으로 일본어 공부를 열심히 할 거고 우리 애는 그럭저럭 따라가며 적응을 잘할 테니 그다지 걱정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내 의사를 분명하게 전할 수 있는 일본어 실력도 안 되었거니와 긴장한 나머지 나와 우리 딸아이는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를 하면서 “요로시쿠 오네가이시마스! 요로시쿠 오네가이시마스!(잘 부탁드립니다)”만 반복하고 말았다.


결국은 교장선생님이 예전에 학교 일로 알게 된 재일코리언에게 급히 연락을 취해 우리에게 소개시켜주면서 무사입학으로 일단락되었다. 그 당시 소개받은 재일코리언 문상(文さん)과는 그 때 그 인연으로 우리가족이 일본에서 지낸 5년 동안 크고 작은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나는 문상과 문상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었고 문상은 나와 우리 아이들에게 일본어뿐 아니라 일본인과 일본사회, 일본문화 등에 대해 시간 날 때마다 찾아와 가르쳐 주곤 했다. 그 당시 문상에게는 참 많은 신세를 졌지만 그러한 인연으로 지금까지 서로 왕래하며 잘 지내고 있다.


내가 모르면 답답하고 사는 게 불편하다.

모르면 물어봐야 한다. 물어보는 것을 부끄러워하면 안 된다.

내가 먼저 다가가 물어보지 않으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고 먼저 알려주지 않는다.

어제와 다른 오늘의 나를 발견하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이 공부다.

공부는 학자나 박사가 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사는 데 답답하지 않기 위해서, 불편하지 않기 위해서 한다.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을 살기 위해 하는 것이 공부다.

어제 몰랐던 사실을 오늘 깨닫는 즐거움, 이것이 공부의 즐거움 아닐까.

 

생각지도 못했던 도노야마소학교(塔山小学校) 교장선생님의 느닷없는 호출로 졸지에 이루어진 일대일 면담은 바디랭기지로 걱정 반 기대 반으로 그럭저럭 마무리는 되었지만, 그 날 이후 한국인 ‘리상 ’가족은 교장선생님부터 학교 모든 선생님들의 도움과 관찰이 요구되는 ‘시선 집중’ 대상 제1호가 되었다. 

Posted by 오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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