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 공부 시작은 유치원 연락장


일본에 온지 6개월이 지난 후 큰 아이는 구립유치원을 졸업하고 집 근처 도노야마소학교(塔山小学校)에 입학했고 작은 아이는 집 맞은편 골목 안쪽에 있는 자그마한 우에노하라(上ノ原) 교회 유치원에 입학했다.


작은 아이가 들어간 사립유치원은 4살 참새반, 5살 토끼반, 6살 기린반 이렇게 세 반이 있었는데 그 중 작은 아이는 나이가 제일 어려 일단 참새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최연소반인 참새반은 9시 반에 시작해서 11시 반에 끝났다. 유치원에서 지내는 시간은 달랑 2시간인데 유치원에 보내려고 아침에 깨우고 씻기고 먹이고 입히고 준비하느라 난리법석을 치르며 헐레벌떡 유치원에 자전거로 데려다주고 집에 돌아와 한 숨 돌리며 겨우 차 한 잔 마시고 나면 다시 데리러 가야할 시간이 되었다.

고만고만한 아이 둘을 데리고 낯선 땅에서 생활하면서 본격적으로 일본어 공부를 시작하기란 생각만큼 그리 쉽지 않았다.


일본어 공부를 위해 나만의 오롯한 시간을 갖는다는 게 일단 무리였다. 아이들 삼시세끼도 해줘야 하고 유치원이 끝나고 아이들끼리 약속해 친구 집에 놀러가거나 하면 품앗이처럼 다음번엔 반드시 우리 집에 아이들을 데려와 놀려야했다. 친구 집에 놀러 가면 자전거로 데려다 주어야 하고 다시 데려오는 것도 일이이라면 일이었다.

공부는 좀 해야겠는데 좀처럼 묘안이 없어 마음만 급해져갔다.


그런데 아이 유치원 담임선생님께서는 그날그날 유치원생활이나 놀이, 친구관계 등을 적어 부모에게 알려주고 부탁도 하는 ‘연락장’이 있었는데 특히 우리 아이는 외국인이라 신경이 더 쓰였던 건지 거의 매일 일기장처럼 그림까지 그려가며 세세하게 기록한 연락장을 아이에게 보내주곤 하셨다.

선생님께서 연락장을 친절하게 써서 보내주면 내가 읽고 뭔가 간단하게나마 답을 해야 도리인데 내 일본어로는 감사의 마음을 십분의 일도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 때부터 일한, 한일사전을 꺼내놓고 일본어와 씨름을 시작하였다.

당장 해야만 했고 꼭 필요했기 때문에 안할 수도 미룰 수도 없는 일이 연락장에 날마다 답장을 쓰는 것이었다.

날마다 조금씩 서투르면 서투른 대로 연락장을 써가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생활 한가운데서 일본어는 그렇게 필요에 의해 몸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아이가 유치원에 다니는 3년 내내 선생님과 내가 주고받은 연락장을 펼쳐보면 이십여 년 전 정성스럽게 아이들을 보살펴주던 선생님들의 자상한 눈빛이 떠올라 지금도 고마움에 감탄하고 또 감탄하게 된다.

한 자 한 자 마음으로 꾹꾹 눌러가며 연락장을 써주신 그 옛날 고마운 선생님들의 아름다운 마음과 모습을 다시금 그려보면서 자칫 흐트러지기 쉬운 내 마음을 다잡게 된다.


행복이란 늘 내 곁에 누군가가 함께 있는 것이다. 우리 곁에 함께 있어주었던 선생님들과 일본인 친구들 덕분에 이십 오년 이상이 훌쩍 지난 지금 우리가 받은 최고의 선물인 행복감을 만끽하면서 그들과의 고마운 인연이 새삼 그리워진다.

 

 

 

 

         (2015.1.24)

Posted by 오경순
,

좌충우돌 일본 생활 분투기


1991년 10월 드디어 도쿄 나카노구(中野区)에 있는 작고 아담한 신축맨션에 우리 네 식구의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그때 큰 딸아이가 6살, 작은 아이는 3살이었다. 큰 아이는 한국에서 유치원을 다니다 왔고 아들아이는 아직 유치원 입학 전으로 한참 손이 가는 개구쟁이에 청개구리 저리가라였다.


남편은 일본에 오기 전 한국 본사에서 새벽 시간에 5개월 정도 일본어를 배우며 나름 준비를 했다. 남편도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하였고 일본어 공부는 처음이었지만 그나마 5개월 정도 공부한 것이 실전에 약간은 도움이 되었다. 꿀 먹은 벙어리격인 우리 셋에 비하면 남편은 그런대로 익힌 그 알량한 일본어 구사에다 중간 중간 바디랭기지를 섞어가면서 안쓰럽긴 해도 의사소통을 간신히 이어가며 하루하루 먹고사는 일상생활에 큰 불편은 없어보였다.


문제는 나와 우리 아이들의 일본어였다. 나는 일본에 오기 직전까지 고등학교 교사 생활을 했으니 일본어나 일본생활에 준비할 시간이 거의 없었고 뭐 어떻게 되겠지 하는 배짱으로 일본에 날아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본어 왕기초인 ‘아이우에오’조차 모르며 일본에서 살아보겠다고 무턱대고 일본 생활에 뛰어들었으니… 그런 용기와 배짱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일본어가 정 안 되면 영어로 하면 되겠지 하는 믿는 구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렇지.


그 당시만 해도 도쿄 나카노구(中野区) 우리 집 근처에는 한국인이 거의 살지 않았고 근처 유치원이나 소학교(초등학교)에 다니는 한국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일본이란 나라가 아무리 가깝다 해도 타국은 타국이다. 생전 처음 생활하게 되는 낯선 이국땅에서 일본어 한 마디 할 줄 모르고 의지할 곳도 없고 여차하는 순간 도움을 청할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더욱 불안하고 초조했지만 내 앞에 길이 없으면 내가 만드는 수밖엔 별 뾰족한 대안이 없었다.


일본에 정착한 다음날 내가 제일 먼저 시도한 것은 자전거타기였다. 저녁에 집 뒤 공터에서 난생처음 자전거 타는 연습을 하며 몇 번을 넘어졌는지도 모른다.

인생은 자전거 타기와 같아서 계속 페달을 밟으면 넘어지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생전 처음 타보는 완전 초보자가 넘어지지 않고 자전거를 배운다는 게 어디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자전거를 탈 줄 모르면 일단 일본생활 특히 도쿄생활은 낭패 보기 십상이다. 슈퍼에서 들고 올 수 없는 무거운 물건을 사도 우리나라처럼 배달이란 게 없다. 집 옆에 바로 유치원이 붙어있다면 모를까 아이들을 유치원에 데려다 줄 때도 자전거에 태우고 가야한다. 큰 아이를 집에서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는 구립유치원에 입학시켰는데 언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세 살짜리 작은 아이를 집에 혼자 놔두고 큰 아이만 데리고 왕복 한 시간쯤 걸리는 유치원을 걸려서 데려가고 데려오는 것은 일단 무리였다.


도쿄생활을 시작하면서 큰 아이 유치원 등하교시키기가 내게 주어진 힘들고 부담스러운 첫 미션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해 도쿄는 늦가을 10월, 11월인데도 왜 그리 가을비가 추적추적 자주 많이도 내렸는지…아침에 눈을 뜨면 하루가 멀다 하고 비가 내렸다. 비오는 날에는 자전거 앞뒤에 아이 둘을 태우고 한쪽 손으론 우산을 받쳐 들고 또 한쪽 손으론 핸들을 잡고 정신 바짝 차리고 부지런히 페달을 밟아댔다. 거의 곡예 수준이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아찔한 순간들이 참 많았는데 이렇다 할 사고 한 번 안 난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 당시는 나뿐만 아니라 내 또래 일본인 엄마들도 아이들 유치원 등하교뿐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웬만한 거리는 거의 자전거로 시작해 자전거로 끝냈다. 자전거 없이는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도쿄에서는 일상생활 자체가 거의 어렵다고 보면 된다.


몇 년 후 들은 얘기지만 자전거를 탈 줄도 모르고 배우지도 않은데다가 일본어도 서툰 한국인 지인이 백화점 바겐세일에서 이것저것 물건과 식품류를 잔뜩 사서 들고 나왔단다. 백화점에서 불과 5분 거리에 있는 전철역까지 걸어가야 하는데 싸게 산 물건들이 너무 무거워 도저히 들고 갈 수가 없어서 가면서 중간 중간에 산 물건들을 하나 둘씩 버리면서 돌아왔단다. 아까워도 할 수 없는 일, 자전거가 없어서 벌어진 대놓고 웃지 못 할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물건 값보다 택시비가 비쌌든지 아니면 택시 잡아탈 일본어실력이 안 되었든지 둘 중 하나이리라. 그래도 그 친구는 끝끝내 자전거를 배우지 않았지만 일본생활을 떠올리면 자전거 얘기부터 꺼내는 것을 보면 그 이후에도 자전거를 둘러싼 이런저런 유감이 참 많았던 모양이다.


애나 어른이나 살아가는 데 필요하다고 절실하게 느끼게 되면 다소 준비가 미흡하더라도 막상 닥치게 되면 무슨 일이든 다 하게 마련인가 보다.

처음 자전거를 배우면서 또 일본어를 더듬더듬 배우기 시작하면서 온몸으로 절절히 체험한 사실 하나.


살아간다는 것은 테크닉이 아니라 실천이다.

실제로 해보면서 끊임없이 연습하고 반복하며 내 몸 안에 긍정의 습관을 키우고 내공을 쌓아가는 거다.


일본어 한 마디 할 줄 몰랐던 큰아이는 유치원에 입학한 후 차츰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놀라울 정도로 일본생활에 빠르게 적응해갔고 일본어도 하루가 다르게 나아지고 늘어갔다. 한 3개월 정도 지난 무렵부터는 친구들과 놀며 대화하는 데 그다지 불편함이 없어보였고 자기 의사를 분명하고도 자유롭게 주고받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아이들은 빨리 배우고 빨리 잊어버린다지만 역시 맞는 말이다. 내 눈으로 실감했다.

아이들의 일본어 걱정은 기우였다.

우리 집에서 내 일본어가 가장 큰 걱정거리로 대두되는 데는 3개월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일본 한가운데서 일본인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엇보다 일본어가 필수였다. 당장 어디 한군데라도 아프면 병원에부터 가야하고 유치원 보호자 모임도 한 달에 두 번씩이나 있었다. 일본어를 잘 모른다고 짧은 영어지만 나만 영어로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급한대로 상투적인 일본어 몇 마디라도 달달 외어서라도 해야 하는 시급한 상황이었다.


가뜩이나 우왕좌왕, 좌충우돌하며 정신을 못 차리는 와중에 내가 지고 가야 할 일본어 스트레스라는 묵직한 짐 또 하나가 내 등에 얹어졌다.


외국을 여행하는 것과 외국에서 실제 살면서 생활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외국을 모르고는 고국을 모르듯 외국생활에서 훨씬 더 많이 자신을 살피게 되고 전혀 몰랐던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내게도 그랬다.

새로운 언어공부는 새로운 자아성찰이며 새로운 도전이었다.

내 나이 서른셋에 시작한 일본어 공부라는 새로운 도전은 두려움보다는 해볼 만한 설렘으로 점점 벅차올랐다.

떠나오지 않았다면 결코 맛보지 못할 ‘Slow Starter(늦깎이)의 유쾌한 도전’, 일본 생활 좌충우돌 분투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2015.1.24)


Posted by 오경순
,

내 아버지는 1914년생으로 고향은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꽃으로 유명한 평안북도 영변(寧邊)의 약산(藥山)이다.

아버지는 약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20대가 된 1940년대에는 먹고살기 위해 만주에서도 오지인 러시아 국경 쪽 헤이룽강 부근 건설현장에서 일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때였다. 건설현장에는 일본인 사장들과 중간 관리자인 한국인 반장들이 있었고, 그 외는 대부분 현장 노동일을 하는 중국인들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전쟁이 끝나면서 아버지가 일하던 건설현장도 쑥대밭이 되었다. 다급해진 일본인들은 자기들끼리만 몰래 따로 모여 도망을 갔고, 평소 현장에서 인심을 잃었던 한국인들은 중국인들에게 맞아죽기도 했다고 한다. 그 중 인심을 잃지 않고 성실했던 한국인들은 낮에는 중국인들이 숨겨주어 무사히 지내다 밤마다 걸어서 평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 당시 헤이룽강 건설현장에서 걸어서 평양에 도착하는 데에는 한 달 정도 걸렸다고 한다. 한 달 정도 밤길을 걷고 또 걸어 기적처럼 살아 돌아와 드디어 평양에 생활터전을 잡았다. 아버지가 31살 때 일이다. 사투를 벌이며 겨우 자리 잡아 가던 평양생활도 몇 년을 못 넘기고 또 다시 한국전쟁이 터졌다. 그야말로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1951년 무렵 일사후퇴 때 또 다시 맨몸으로 부모형제들과도 생이별을 하며 간신히 목숨 하나 부지한 채 살기 위해 남으로 남으로 부산까지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 때 아버지 나이는 서른일곱, 여전히 청춘이었지만

몸과 마음은 모든 것 다 잃고 망연자실한 무연고 노년의 무기력한 심정이었으리라.

 

그 고단하고 헛헛한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머니를 만나 일사후퇴 때 함께 남으로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 할 수 있을는지. 그 후 또 다시 이어지는 살아남기 위한 아버지의 모진 여정에는 쉼표가 없었다. 전국 각지를 다니며 안 해본 행상이 없을 정도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닥치는 대로 밤낮 없이 일했다.

 

그러다 드디어 정착한 곳이 서울 남산 아래 해방촌이란 동네였다.

해방촌은 8.15 해방과 함께 북쪽에서 넘어 온 사람들, 그리고 우리처럼 한국전쟁 때문에 남으로 피난 나온

사람들이 모여 정착하면서 그리 불렸다.

 

해방촌이 나의 고향이다. 나는 그곳에서 사남매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해방촌 아래 용산에는 미군부대가 있었는데 오며가며 미군들과 늘상 마주쳤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1960년대 중반 무렵에는 국제시장에도 등장하는 “헬로 기브 미 쪼꼬렛또”, “헬로우 기브 미 껌”하면서 미군들 뒤를 졸졸 쫓아다니면 미군들이

땅바닥에 던져주는 쪼꼬렛토와 껌을 주워 먹곤 했던 가난하고 슬픈 내 어린 시절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평소 아버지는 별로 말이 없었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공부하라는 소리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말수는 없었어도 늦둥이 막내딸을 바라보는 눈빛은 애잔했고 남달랐다.

왜 그렇지 않았겠는가. 느닷없이 피난인파에 떼밀려 고향산천을 떠나오면서 부모형제와 생이별을 하고 피붙이 하나 없는 낯선 남한 땅에서 궂은 고생 다해가며 간신히 남산 아래 발 뻗고 잘 수 있는 터전 하나 마련해 그렇게 가정을 꾸리고 마흔 훌쩍 넘어 얻은 막내딸인데. 살아생전 얼마나 더 볼 수 있으려나…하는 애달픈 마음에서였으리라.

 

내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생각하면 두고두고 가슴 찡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고3 때였다. 나는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수도여고를 다녔다. 1970년대는 대입 예비고사 제도가 있었고 예비고사 과외가 성행했던 때다. 친구들은 학교 수업이 끝나면 종로나 서울역 쪽 학원으로 향하거나 과외수업을 받으러 서둘러서 학교 문을 나섰다.

 

새삼 생각해보니 우리나라 교육열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단지 차이는 사교육비가 지금처럼 고액은 아니었던 것 같고 이런저런 난리통 속에서 좀처럼 배울 기회가 없었던 대다수 우리 부모세대는 단지 출세나 성공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식만큼은 제대로 가르쳐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다는 그 일념 하나로 버텨내며 자식들 뒷바라지에 온 마음을 쏟지 않았나 싶다.

 

나는 학원을 다닌 적도 없고 과외수업을 받은 적도 없다. 가정형편에 여유도 없었거니와 어떡하다보니 학교 성적도 그런대로 괜찮게 나오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내가 고3 때 이미 환갑이 지난 아버지와 어머니가 동네에 내세우는 유일한 자랑거리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막냉이(어머니는 막둥이를 이리 불렀다)는 학원도 안 다니고 과외 한 번 안 해도 잘만 한다우.”

그 당시 늙고 가난한 부모님의 이런 소박한 낙(樂)을 나 역시 웬만하면 오래도록 유효하게 유지하고픈 마음 또한 간절했다.

 

집과 학교는 지척 거리인지라 고3이 되자 나는 아무런 쓸데없는 무익하고 무모한 계획을 하나 세웠다. 수도여고 전교생 중에 제일 먼저 학교에 가고 가장 나중에 학교를 나서는 거였다. 부모님 말대로 ‘학원 한 번 안 다니고 과외 한 번 안 해도 잘만 하려면’ 무조건 남들보다 학교에 단1분이라도 더 오래남아 공부를 해야 한다고 각오를 다졌고 부모님의 자랑거리의 유효기간을 늘리기 위해선 이 방법 밖에 없다고 믿었다.

 

그러다보니 학교 문도 안 열린 어둑어둑한 새벽녘 수위아저씨가 오기를 기다린 적도 여러 번 있었고 자칭 수도여고 정문 개폐 관리 총책임자 역을 도맡아 했다. 날이 채 밝지 않은 새벽 어스름한 시간에 집을 나서 깜깜한 밤에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이를테면 잠자는 시간 외에 내 모든 일과는 학교 안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이때부터 아버지 어머니의 고3 막내딸 ‘도시락 배달 작전’이 개시되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온 종일 학교에 남아 있으려면 적어도 삼시세끼는 꼭 챙겨먹어야 했다. 전교생 중 가장 먼저 학교에 도착한다는 셀프약속을 지키려면 일어나자마나 일분일초라도 서둘러야 했다. 이른 새벽 집을 나서야 했기에 아침밥 먹을 시간도 없었고 도시락 싸주기를 기다릴 여유 따윈 전혀 없었다.

아버지 어머니는 연로하고 딱히 하는 일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집과 학교만을 오가는 고3 딸을 위해 뭔가 해주긴 해줘야 하겠는데 마땅한 일도 없는 듯 했다.

 

내가 새벽에 학교에 가고나면 어머니는 그 때부터 도시락을 싼다. 하루 세 번 매번 따끈따끈한 밥을 새로 지었다. 그 다음은 아버지가 나설 차례다. 그 도시락을 아버지가 들고 학교 정문 수위실로 어김없이 하루 세 번씩 배달했고 나는 수위실에 달려가 도시락을 찾아서 먹곤 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일 년 동안 세 번씩 정해진 시간에 도시락은 정확히 배달되었다.

 

도시락에 얽힌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한 번은 아버지가 도시락을 수위실에 맡기지 않고  한 창 수업 중인 우리 반 교실까지 직접 가져왔다. 공부를 하다 말고 어느 순간 친구들의 시선이 일제히 복도 쪽으로 쏠렸다. 보자기에 싼 도시락을 들고 복도를 서성이는 누추한 할아버지 모습이 얼핏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였다. 드디어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는 생각에 어떻게 수습해야할지 공부고 뭐고 좌불안석이었다.

 

나는 키가 작은 편이라 앞에서 두 번째 줄에 앉았는데 맨 뒷줄에 앉아있던 키 큰 친구가 살짝 뒷문을 열고 나가 도시락을 받아왔다. 그날 도시락은 특별 메뉴로 김밥이었다. 맨 뒷줄부터 도시락이 한 줄 한 줄 앞으로 전달되면서 약속이라도 한 듯 도시락 뚜껑이 한차례씩 열리고 김밥이 하나 둘씩 사라졌다.

진작 내 손에 도시락이 들어왔을 때는 달랑 네댓 개 밖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 사건을 계기로 그날 이후 ‘아버지의 도시락’은 고3 교실에 소문이 자자해지면서 입방아에 오르내리기도 하였다.

 

찬은 늘 소소하고 소박했지만 아버지의 도시락은 고비마다 꿋꿋하게 버텨낸 아버지의 강철처럼 단단하고

진한 세월의 무게가 배어있어 내겐 그 어떤 도시락보다 귀하고 화려한 선물과도 같았다.

 

내가 남들보다 한참 늦은 나이에 박사공부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누가 뭐래도 그 옛날 아버지 어머니가 만들고 날라다준 도시락 덕분이다. 그저 도시락이 아니다. 내 공부의 힘의 원천은 바로 아버지의 도시락이다. 연로한 부모님이 내게 해줄 수 있었던 최후의 사랑이었으며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유산이었다.

 

훗날 내 아이들도 내 나이가 되었을 때 평생을 두고 그리워하며 자랑스러워 할 삶의 나침판을 물려받았노라 추억할만한 유산을 물려줘야겠는데…이미 도시락 유산은 감히 흉내도 못 낼 테고…날로 쇠락하는 삶속에 또 하나 큰 짐이 더해진다.

(2015.1.10)

Posted by 오경순
,

영화 국제시장 흥행 뒷심이 무섭다.

15년 1월 10일자로 870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이대로라면 얼마 안 있어 천만도 뛰어넘을 기세다. (2017년 9월 11일 현재 국제시장 관람관객 총수는 천사백이십육만 명을 뛰어넘어 1위 명랑에 이어 역대 최다관객 동원  2위를 기록했다.)

 

물론 찬사와 혹평이 동시에 쏟아지며 설전도 오가며 여기저기서 논란도 불거지고 있다.

“영화는 영화로 봐주셨으면 한다”는 유제균 감독의 하소연이 무색하리만치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차와 정치적 이념 논쟁도 흥행에 톡톡히 한몫 거두는 듯하다.

 

나도 국제시장을 봤다. 그것도 혼자서 조조할인으로 봤다.

오전 10시인데도 빈자리가 별로 눈에 띄지 않았고, 주위를 둘러보니 관객들도 남녀노소 다양했다.

영화 국제시장의 관람 평이나 감상소감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국제시장뿐 아니라 어떤 영화든 연극이든 그에 대한 평이나 의견은 다양한 관객 수만큼 각양각색인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개개인의 역사와 인생사 및 가치관과 맞물려 확대 해석하며 볼 수도 있고 혹은 아무런 생각 없이 단지 좋아하는 배우의 연기에 몰입해 볼 수도 있다.

 

870만 관객 한 사람 한 사람의 어떠한 평가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왈가왈부 한다는 것은 그만큼 대중의 관심이 쏠릴 정도로 이슈화됐다는 흥미로움의 반증이니 좋고, 대립되는 분분한 의견들은 그래도 우리 사회에 거는 희망과 믿음이 숨 쉬고 있다는 증거니 그 역시 안심되어 좋다.

 

나는 영화 국제시장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봤다.

내게 국제시장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비디오테이프로 빠르게 되돌려 추억하는 ‘아버지의 인생 역정 다시보기’였다.

 

국제시장의 주인공은 덕수가 아닌 바로 내 아버지로 일사후퇴부터 남북이산가족찾기에 이르기까지 고비 고비 눈물과 한숨으로 얼룩진 일련의 사건들을 보고 있노라니 마치 아버지 일대기를 영화로 만들어 놓은 듯 했다. 영화 속에서 너나없이 가난했던 희미한 내 어린 시절 기억도 얼핏 스쳐지나갔다.

 

내 나이 대라면 구태여 영화를 보지 않더라도 짐작할만한 뻔한 줄거리에 중간 중간 군더더기 대사로 오히려 촌스러운 장면 연출도 더러 있었다.

먹고살기가 녹록치 않은 세상, 정신없이 살다보니 기억도 가물가물한 그 옛날 그리운 아버지를 회상하며 아버지의 삶을 다시보기 하면서 내 삶을 다지는 시간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무릇 책은 저자가 짓고 번역서는 역자가 번역하며 편집자가 다듬어 완성하지만 품질이나 가독성 등 최종 평가는 결국 독자의 몫이다.

마찬가지로 영화 국제시장의 최종 평가는 관객 한 사람 한 사람의 몫으로 돌리는 게 맞지 않을까.

(2015.1.10)

Posted by 오경순
,

 

소노 아야코(曾野綾子) 著 / 오경순 옮김 / 도서출판 리수 / 2002년 4월 출간

마흔이후 나의 가치를 발견하다』개정판 / 2012년 1월 출간

 

 

 

◆ 하루는 24시간뿐이다. 도저히 우리 마음대로 조작 불가능한 것이 바로 시간이다.

    시간은 가장 잔혹하다. 시간은 최고의 성실을 요구한다.

    누구에게, 어디서, 무엇을 단념하고 무엇을 선택하기 위해 사용할 것인가를 분명히 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나는 시간이 두렵다.

 

◆ 지난 날 불행한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 자신만의 재산이나 비료로써 철저하게 자신의 것으로

    승화시킨 사람은 작가도 될 수 있고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잘 적응할 수가 있다.

    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기에 여간해선 손에 넣기 쉽지 않은 불행이라는 사유재산을 결코 사회에도

    운명에도 세무서에도 돌려주지 않았다. 나는 불행한 기억들을 철저하게 비축해서 비료로 사용했다.

 

◆ 우리 인생의 모든 것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중년이후가 말 그대로 진정한 인생이다.

    단지 그저 사교를 위한 만남이라면 언제든 가능하다. 그러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는 두터운 인간적

    교류를 원한다면 내 스스로 인간을 바라보는 안목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떠한 관점에서 사람을 판단하느냐 하는 성숙된 기술은 젊었을 때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선택이다.

    그러한 준비가 가능해지는 때가 중년이다.

 

◆ 우리에게 흥미로운 사실은 저마다 한쪽으로 치우진 인생을 살아가고 있음을 우리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시간이란 냉엄한 것이다. 아무리 급해도 시간만큼은 조작이 불가능하다.

    공들여 시간을 비축해서 카세트나 비디오테이프의 빨리 감기처럼 빠르게 다른 사람의 곱 절을 체험할 수는

    없다.

    당연한 일이나, 젊었을 때는 아직 많은 사람을 만나지도 못했다. 그리고 사람이란 지금까지 자신이 만났던

    사람의 수만큼 현명해지게 된다.

 

◆ 추한 것, 비참한 것에서도 가치 있는 인생을 발견해내는 것이 중년이다.

    여자든 남자든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겉모습이 아닌 그 사람의 어딘가에서 빛나는 정신, 혹은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때가 중년이다. 대체로 우리의 정신이란 중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완숙되는 면이 있다.

   

◆ 영화관이나 극장에서만 인생을 즐기는 게 아니다. 가장 훌륭한 극장은 우리가 살아가는 바로 현재의 삶이 

    다. 그곳을 지나가는 모든 사람에게서 드라마나 매력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 이상의 즐거움이란 없다.

    극장 안에서든 밖에서든 드라마를 볼 수 있는 때가 바로 중년이다.

 

◆ 손에 넣은 것은 손에 넣는 순간부터 잃어버릴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이것은 현세의 엄연한 약속이다.

 

◆ 오래 살다보면「얻는 것」도 있겠지만, 그 이상으로「잃어버리는 것」도 많다. 이것이 중년이후의 숙명이

    다.

 

◆ 자식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자식일수록 부모가 떠나게 되면 가장 먼저 재산상속의 권리를 주장하고 나선

    다.

 

◆ 인생이란 이론대로 되지 않는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 넷도, 다섯도 될 수 있으며

    혼신을 다해 노력했지만 하나 그대로인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 모든 사람이 다 똑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일이 계산대로 라고 믿는 사람이나, 계산대

    로 되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사람은 훗날 사진 속에서도 그저 나이만 들었을 것 같고, 계산대로 되지 않는

    것을 오히려 재미있어하는 사람은 아마도 젊었을 때의 사진보다는 나이 든 후의 사진이 훨씬 매력적인

    사람으로 보이리란 생각 이 든다.

 

◆ 인생이란 물질적으로 풍족하더라도 괴롭고, 부족하더라도 괴롭다.

 

◆ 병이 잘 낫지 않는 것은 죽음으로 치닫고 있다는 말이다. 참으로 슬프고 잔혹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누구에

    게나 똑같이 찾아오는 공평한 운명이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인간은 비로소 깨닫게 된다. 걸어 다닐 수 있

    다는  것은 얼마나 크나큰 축복인가. 자기 스스로 먹을 수 있고 배설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위대한 일인

    가.

    더 더욱 아직도 정신이 맑아 다소 철학적인 사고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어쩌면 몇 십억 짜리 복권 당첨과도

    견줄 만한 요행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사실은 중년 이전에는 결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 젊었을 때는 무엇보다도 돈이 소중했다. 취직, 결혼, 양육, 아이교육, 집 장만 등 이 모든 것에 돈이 들어간

    다. 돈이란 아무리 많아도 남아도는 법이 없다. 그러나 중년이후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대부분의 인생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 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 정말로 믿을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이며 흥미로운 일이다. 우리는 사랑이 사람을 구 제 할 수 있다는 사실

    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가끔은 증오심마저도 사람을 구제할 수 있음을 중년이 되기 전까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

 

◆ 품격 있는 대화만 가능해도 아무도 무시하지 않는다. 우리가 지금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90% 정도는

    없어도 살아가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는 것들이다.

 

◆ 그 어떤 사람이 사라진들 이세상은 끄떡없이 잘 돌아가게 마련이다. 중년이후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내가 없어도 어느 한 사람 곤란해 하지 않는다는 엄연한 현실을 똑 바로 인식하는 일이다.

    나 한 사람 없어진들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참으로 비참하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나뿐만

    아니라 그 누구가 없어도 이 세상은 아무런 차질 없이 잘 돌아가게 마련이므로 기본적으로 우리는 안도감

    을 가질 수 있게 된다.

 

◆ 너나 할 것 없이 대체로 우리는 평범하고「보잘 것 없고」「별 볼일 없는」존재다. 지금까지 잘 살아왔다

    면 운이 좋았든지 아니면 용케도 다른 사람이 도와줬기 때문일 뿐이다.

 

◆ 어느 한 가지를 얻으면서 다른 한 가지를 포기하게 되면 용서 받을 것 같은 느낌이 든 다. 이것저것 죄다

    욕심을 부리는 것이 잘못된 거다.

 

◆ 자식이란 참 묘하게도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인생을 진하게 만든다. 기쁨도 증오심도 배가시킨다.

    바로 이것이 자식이라는 존재가 주는 선물이다.

 

◆ 우리는 중년이후 육체가 쇠퇴하면서야 비로소 인생의 본질을 발견하는 재능을 터득하게 된다.

'Slow Start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부의 힘, 아버지와 도시락  (0) 2015.01.10
아버지와 국제시장  (0) 2015.01.10
어떻게 태어난 인생인데…  (0) 2015.01.03
논문을 쓸까? 번역을 할까?  (0) 2014.12.30
홋카이도에서 만난 부처(仏様)  (0) 2014.12.26
Posted by 오경순
,

지난해에는 1월과 7월 일이 있어 일본에 두 번이나 다녀왔다.

 

1월 어느날 아침 우연히 TV를 켜니 아가와 사와코(阿川 佐和子) 씨가 진행하는《사와코의 아침(サワコの朝)》이란 아침 토크쇼 프로에 여배우 요시유키 가즈코(吉行 和子) 씨가 초대 손님으로 나왔다. 1935년생이니 현재 79세인 현역배우이다. 지금도 다양한 작품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쳐가는 팔팔한 시니어인 이른바 오팔족의 전형이라 할만하다.

 

오팔(OPAL)족이란 ‘활동적인 삶을 살고 있는 노인들(Old People with Active Life)’의 뜻으로 초(超)고령사회로 접어든 일본 사회에서 소비의 주역으로 떠오른 노년층을 지칭하는 일본에서 만들어진 신조어다.

 

사실 칠 팔 십대 오팔족 시니어 세대가 도전 정신으로 재무장하고 젊은이나 중장년층도 무색하리만큼 쌩쌩하게 현역활동을 이어가는 모습은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이젠 그다지 낯선 풍경이 아니다.

 

내가 이 프로에 눈을 떼지 못하고 감탄한 이유인즉슨 이 79세 여배우의 어머니가 현재 107세로 여전히 건강하며 오히려 79세 싱글인 딸의 일상을 걱정하며 늘 챙겨준다는 사실이었다.

 

바야흐로 인생백세 시대를 실감하는 요즈음이다.

 

장수(長壽)는 축복이자 리스크다.

오래 살게 되면 ‘얻는 것’도 있겠지만, 그 이상으로 ‘잃어버리는 것’도 많게 된다.

물질적으로 풍족하더라도 괴롭고, 부족하더라도 괴로운 것이 인생의 숙명이다.

 

현역 때는 일에 쫓기며 앞뒤 돌아볼 겨를 없이 살다, 정년 후의 인생설계, 취미활동, 노후 준비 하나 없이

어느 날 느닷없이 귀가한 남편들을 젖은 낙엽이 달라붙으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해 이른바 젖은 낙엽족’이라는 둥 아내만 졸졸 따라다닌다 해서 ‘아내 따라 삼만리족‘ 혹은 아내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에

‘아내 관심 구걸족’이라는 둥 안쓰럽고 딱한 신조어가 하루가 멀다 하고 등장한다.

 

남성들 입장에서는 심란하고 애처로운 이런 저런 비유가 아내 없인 혼자서는 자립도 어렵고 하루도 마음 편히 생활할 수도 없는 대다수 남성의 자화상이 아닌가 싶다.

 

우리 인생에는 세 가지 정년이 있다고 한다. 이름 하여 ‘고용 정년’ ‘일 정년’ ‘인생 정년’이다.

 

고용 정년이란 글자 그대로 다니던 직장에서 ‘이젠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최후통첩을 선고받는 타인이 정하는 정년’이다. 고용 정년은 누구에게나 온다. 조금 이르면 제 발로 나오게 되고 조금 늦으면 등 떠밀려 나오게 되어있다.

일 정년은 고용 정년과는 달리 자기가 자기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천직 혹은 천명으로 영어로 말하면 프로페션(profession)이 아닌 보케이션(vocation)에 해당한다. 소위 말하는 제2의 인생이다.

 

인생정년은 누구든 때가 되면 맞이하는 인생의 소풍을 끝내는 시간이리라.

 

엄청 무더웠던 7월 여름 도쿄에 갔을 때는 오랜 지인인 재일코리안 문상이 소개해줄 사람들이 있다면 내 손을 잡아끌었다. 문상이 사는 도쿄 나카노구 동네에서 시작한 작은 지역사회 봉사활동인 이른바 '야마토 나데시코 모임'이었다. ‘야마토 나데시코’란 일본 여성을 아름답게 칭하는 일본말이다.

우리말로는 ‘우아한 일본여성들의 모임’이라 할까.

 

일본은 세계 제1위 최장수 국가이며 인구 4명중 1명이 65세 이상인 노인천국이다.

평균수명은 여성은 약 87세, 남성은 약 81세로 홀로 남은 여성들이 당연히 많다.

 

그 날 모인 '야마토 나데시코' 회원 9명 중에서 최연소자는 68세, 최고령자는 99세로 그 외 평균 나이는 89세였다. 모두 홀로 남은 부인들이다. 혼자 적적하게 시간을 때우던 그들이 한 사람 두 사람 의기투합하여 집안에 방치됐던 오래된 일본전통예복인 ‘기모노’를 재단하고 바느질하여 손가방이나 도시락가방 등 생활소품들을 만들어냈다. 다른 건 몰라도 바느질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입소문이 나자 구매자가 줄을 잇고 예약주문을

받을 정도로 인기도 치솟았다.

 

예전에는 초저녁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요즘은 바느질에 재미를 붙이면서 쏟아지는 주문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온 몸과 마음을 쏟아 부었다. 판매 수익금은 지역 장애우 단체나 생활기반이 취약한 외국인단체에 기부한다고 한다. 세상에 나와 봉사활동을 시작하면서 지역사회에 기여한다는 자긍심도 생겨 삶의 활력을 되찾고

몸과 마음의 건강도 몰라보게 달라졌다. 무엇보다도 지루했던 하루하루가 새삼 즐겁고 행복해 살아있는 기쁨에 ‘원더풀 인생’이 절로 나온다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일 정년’인 제2의 멋진 인생을 살아가는 생생한 본이 아닐까 싶다.

 

 

<야마토 나데시코 모임,  2014.7.22 촬영>

 

 

 

<야마토 나데시코 모임,  2014.7.22 촬영>

 

 

 

 

<선물로 받은 기모노의 오비(허리띠)로 만든 손가방과 행주

 야마토 나데시코 회원 작품,  2014.7.22 촬영>

 

 

인생백세 시대를 자유롭고 충실하게 보내기 위해서는 ‘고용 정년’ 다음의 ‘일 정년’을 어떻게 자신만의 개성으로 디자인하느냐에 달렸다.

 

제2의 인생은 특급열차에서 완행열차로 갈아타며 새로운 인생을 마이페이스로 시작하는 시기이다.

 

중국에서는 노안을 화안(花眼)이라 한다고 한다. 꽃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연령이라는 뜻이다. 이 세상에는 꽃의 종류가 대단히 많지만, 꽃 하나하나의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음미할 수 있다는 것은 나이가 듦으로써 변하고 시들어 사라져가는 것, 즉 우리네 인생의 참다운 가치를 깨닫게 되는 소중한 연령이라는 말이다.

감동(感動)이란 글자그대로 ‘마음이 느껴져(感) 마음이 움직이는(動)’ 것이다. 세상과 인생에 대해 감동의

의미를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도 이때쯤이 아닌가 싶다.

 

정년은 끝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인생의 시작이다. 괴롭고 힘들었던 트레이닝 기간이 끝나고 가까스로 실전을 맞이할 수 있는 시기이다. 긴장을 늦추거나 우왕좌왕할 겨를이 없다.

누구든 한번은 젊고 한번은 늙는다. ‘이 나이에...’하며 어느 샌가 훌쩍 지나가 버린 진미(眞味)기간 운운한들 별 뾰족한 수가 없다.

 

과연 어떻게 인생에 탄력을 주는 새로운 신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겠는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나이든 이든 젊은이든 싱글이든 커플이든 누구든 한 번쯤은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을까?

소박한 마음으로 세상사는 것이 갈수록 녹록치 않다. 인생은 늘 어렵고 힘이 들지만, 그래도 힘이 들수록 우리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인생인지…이러한 문제에 자꾸자꾸 물음표를

던지게 된다.

 

어떻게 태어난 인생인데… 결국 인생의 본무대는 언제나 바로 지금부터 라는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2015.1.3)

 

 

 

Posted by 오경순
,

논문을 쓸까? 번역을 할까?

 

요즘 번역가는 많지만 믿고 맡길만한 제대로 된 번역가 찾기가 쉽지 않다고들 한다.

왜 그럴까?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과연 우리 사회가 제대로 된 번역과 번역가에 걸맞는 대우와 평가를 하고

있느냐와 관련된 문제다.

 

모든 투자의 기본 룰은 ‘High Risk High Return’이 원칙이다.

‘Low Risk High Return’ 운운하며 유혹한다면 그 건 투자가 아니라 사기다.

 

그러나 번역만큼은 다르다.

번역은 누가 뭐래도 ‘Low Risk High Return’의 투자다.

이 말에 딴지를 걸 사람이 혹시 있을까.

 

번역은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수준 높은 문화를 들여와 우리의 삶과 문화를 살찌운다.

모든 문화 한 가운데 번역이 존재한다.

번역을 문화의 힘으로 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요컨대 번역은 문화이자 문학이고 예술이다.

고로 번역가는 고도의 창조적 문화메신저라 할만하다.

 

그러나 번역은 꽤 수준 높은 스칼라십이 필요한 지난한 작업이다.

더욱이 학술번역서는 학술논문보다 몇 배의 시간과 품이 요구된다.

한 권의 학술번역서를 제대로 번역하려면 많은 관련 서적이나 번역서, 참고자료 등을 읽어내야 한다.

 

그러나 교수임용 시나 대학에서 실적이나 업적을 평가하는 경우 대개 번역서는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한다.

학술활동 실적, 업적에 기입란조차 없는 경우가 태반이며 홀대받는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어느 학자가 선뜻 번역을 하겠는가?

그것도 몇 년씩이나 붙들고 있어야 할지 모르는 번역을.

 

까뮈를 전공하는 인문학자들에게 “그의 대표작『이방인』을 번역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그것에 대한 논문

한 편을 쓰시겠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십중팔구는 논문을 쓰겠다고 할 것이다. 다 이런 연유에서 이리라.

 

한 편의 학위논문을 내면 과연 몇 사람이나 그 논문을 읽는지 어느 일본인 학자가 통계를 낸 적이 있었다.

놀랍게도 학위논문 한 편 당 1.5명이었단다. 그것도 그 1.5명 안에는 논문 쓴 저자까지 포함된 수치란다.

다시 말해 저자를 빼고는 평균 한 사람도 읽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떨까?

 

<지나치게 큰 '논문'의 위력>이란 칼럼을 쓴 부산대학교 중문과 김세환 교수의 인문학자와 인문학 논문에

관련된 칼럼 일부분을 들여다봐도 논문을 읽는 사람 수는 일본의 사정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인문학 분야 논문은 대체로 본인을 포함해 보는 사람이 없다. 2011년 한국연구재단은 어느 두 인문사회

학술지에 실린 논문 110편이 국내에서 한 번도 인용되지 않았다는 분석 결과를 공개했다.

학위논문도 다르지 않다. 그 논문을 다시 볼 일은 거의 없다.

인문학자는 창작이나 저술로 자신의 학문을 학교나 사회와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학문은 고귀해서 대중화될 수 없다는 편견이 아무 의미도 없는 논문을 쓰게 한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면 쓰레기와 무엇이 다른가?“ [조선일보: 이슈진단 (2013.4.5)]

 

그러나 번역서는 아무리 안 읽는다 해도 한 권당 적어도 수백 명 정도는 읽지 않겠는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사회적 기능과 기여도만 따져보더라도 번역과 논문은 이렇게 확연한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번역에 대한 우리 사회 대다수의 인식과 학계의 시선은 여전히 제한적이며 관심 밖이다.

우리의 번역 실상이 참 부끄럽고 슬프다.

 

일찍이 김용옥은『東洋學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논문의 허구성과 번역의 어려움에 대해 이렇게 토로한 바 있다. 새삼 공감가는 대목이다.

 

“일본 학계에서는 한 학자를 평가하는 데 번역을 제일의 업적으로 평가한다. 이유는 번역이 학문 활동 중에서 가장 긴 시간과 가장 수준 높은 스칼라십을 요구하기 때문이다.「~에 관한 논문」을 쓰는 일은 그것에 대한 철저한 지식이 없더라도 가능하다. 해석이 안 되는 부분은 슬쩍 넘어갈 수 있고, 또 책을 다 읽지 않더라도

적당히 일관된 논리의 구색만 갖추면 훌륭한 논문이 될 수 있다. 허나 번역의 경우는 전혀 이야기가 다르다. 그 작품의 문자 그대로 ‘완전한’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모르는 부분을 슬쩍 넘어갈 수 도 없고 또 전체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부분의 철저한 해석조차도 불가능하다.”

 

일본은 이미 노벨문학상 작가를 두 명이나 배출해냈다.

아시아에서는 단연 톱이다.

메이지시대부터 이어져 온 명실상부한 번역대국으로서 이름값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1968년 소설『설국(雪國)』으로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岡成)와 1994년에『만엔 원년의 풋볼(万延元年のフットボール)』로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또 다시 세 번째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만들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해마다 무라카미 하루키 등 유명

인기 작가들이 물망에 오르내리고 있다.

 

번역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설국』을 번역하여 일본 최초의 노벨문학상을 안긴 번역가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Edward Seidensticker)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자신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지명된 직후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상의 절반은 번역자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의 몫이다.”

 

얼마나 멋지고 부러운 멘트인가.

번역과 번역가를 대우하고 평가하는 번역대국 일본과 우리나라의 인식 차이다.

우리도 한국의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가 시급하다.

 

그래야 나부터도 주저 없이 ‘논문을 쓰느니 번역을 하지’

(2014.12.30)

 

Posted by 오경순
,

지금으로부터 이십 사년 전인 1993년 늦가을 일본 홋카이도(北海道)를 여행할 때 생긴 일이다.

아사히카와(旭川)에서 기타미(北見)를 거쳐 여간 운이 좋지 않으면 늘 짙은 안개 때문에 그 맑고 아름다운

호수를 좀처럼 보기 어렵다는 아칸코(阿寒湖)와 마슈코(摩周湖)를 구경하러 가는 길이었다.

 

단풍이 화려하고 멋진 시월 말 늦가을 저녁.

기타미시에서 외곽으로 벗어난 일차선 작은 도로를 달리던 중이었다. 부슬부슬 내리던 빗방울이 점점 굵어져 장대비로 변하면서 차창 밖은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게 되었고, 가로등 하나 없는 주위는 어느새 칠흑의 어둠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일차선 도로의 바로 옆은 깊게 패인 논두렁.

뒤에서 계속 달려오는 차들 때문에 잠깐 차를 세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좋지 않은 일은 한꺼번에 일어난다고 했던가?

그때 달리던 차의 보닛 (bonnet)에서 갑자기 검은 연기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이상한 굉음소리와 함께

조금씩 나던 연기가 어느새 시커멓게 차를 뒤덮었다. 순간 곧 폭발할 것 같은 무서운 예감이 엄습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쌀쌀한 늦가을의 깜깜한 밤.

한 여행자의 낯선 이국의 초행길에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더 이상 차를 몰 수는 없는 지경이었다. 도로 한쪽에 차를 세워놓고, 사고 표시판을 세우고 사고등을 켜놓았다. 온몸이 비에 젖고 겁에 질려 춥고 떨려왔다. 깜깜한 시골길, 차들이 쏜살같이 달리는 좁은 길 위에 잠시 서 있는 것조차 생명이 위태롭게 느껴졌던 절망의 순간이었다.

 

몇 대의 차들이 그냥 지나쳐 가버리고 난 얼마 후, 조그만 차 한 대가 내 차 뒤에 멈춰 섰다. 그리고 중년 나이 쯤 되어 보이는 한 남자가 차에서 내려 내게 다가왔다. 나는 그에게 눈앞에서 벌어진 자초지종을 대충 전하고 도움을 구했다. 그 사람은 시내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한다.

 

그리고는 마침 그 근처에 그의 친한 친구가 살고 있으니, 일단 그 친구 집으로 가서 몸을 녹이고 난 후에 차를 고쳐보자고 했다. 나는 그를 따라 캄캄한 논길을 한참 걸어 허름하고 자그마한 낡은 목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조그마한 방 두 칸과 부엌이 붙어있는 전형적인 일본식 집의 비좁은 내부였다.

 

연세 지긋하신 두 노부부와 중년의 부부 내외 그리고 손자, 손녀가 막 저녁상을 물린 뒤였다. 나는 따뜻한 차 한 잔을 받아들고, 춥고 떨리던 몸을 녹일 수 있었다. 중년의 두 남자는 잠깐 기다리라며 밖에 나가서는 한참만에야 비에 흠뻑 젖어 돌아왔다. 차의 에어컨에 문제가 있었다고 했다. 에어컨 선을 끊어놓았으니 괜찮을 거라고 했다.

 

고맙다는 인사말 몇 마디로 적당히 얼버무리기에는 도저히 예의가 아닌 듯 했다. 또 한없이 부끄럽고 미안한 일인데, 딱히 나의 마음을 전할 묘안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부족하고 어설픈 인사를 몇 번이고 되풀이하며 집을 나서자, 그 평화롭고 소박한 시골집의 가장인 그 남자가 등 뒤에서 나즈막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부처님 말씀대로 한 것일 뿐, 그 외엔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쪼록 즐거운 여행이 되시기 바랍니다.”

(仏様の教えの通りにしただけで、それ以外の何ものでもありません。この先も樂しいご旅行を.......)

 

마치 꿈을 꾸고 있거나, 영화나 연극 속의 한 장면 같았다. 우연이라 하기에는 정말로 믿기 어려운 거짓말

같은 현실이었다.

 

홋카이도에서 만난 그가 바로 부처였다.

 

한 사람을 두고두고 눈물겹도록 감동케 하는 그런 따뜻하고 정감어린 말 한마디라도 누군가에게 건넨 적이 있었던가?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생면부지의 낯선 사람에게 그런 아름다운 친절을 베푼 적이 있었는가? 그처럼

아름답고 멋진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가?

그날 이후 가끔 나는 이렇게 내게 묻는다.

 

나는 믿는다.

가늘고 희미한 한 줄기 빛조차 전혀 보이지 않는 캄캄한 절망 속에서 이젠 포기해야하는 것 아닐까 하며

괴로워하며 피곤하게 지친 인생에도 가끔은 생각지도 못했던 기적처럼 믿을 수 없는 드라마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또 나는 믿지 않는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어지는 것이며, 어떠한 인생이든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 된다는 사실을.

 

살아가면서 날마다 새로운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여간 즐겁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생각해보면 값진 선물과도 같은 기분 좋은 일이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힘이 된다.

 

올 한해도 벌써 많은 사람들과 첫 인사를 주고받았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소중한 사람들이다.

한없이 고맙고 감사하다.

 

2014년도 이젠 며칠밖에 남지 않았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홋카이도에서 내가 만난 부처(仏様)가 떠오른다.

그러다보면 이런 저런 궂은일도 다 위로와 위안이 된다.

 

‘지나간 날들은 언제나 젊고,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언제나 새로운 도전’

이렇게 각오를 다지며 다가오는 멋진 새해를 소망한다.

 

 

(2014. 12. 26)

'Slow Start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떻게 태어난 인생인데…  (0) 2015.01.03
논문을 쓸까? 번역을 할까?  (0) 2014.12.30
박수 치는 사람이 아름답다  (0) 2014.12.25
평생공부는 선택 아닌 필수  (0) 2014.12.19
번역명문가를 찾는다고?  (0) 2014.12.15
Posted by 오경순
,

나는 박수를 치는 게 박수 받는 것보다 기분이 더 좋다.

박수를 받아본 사람은 안다.

박수 받는 순간의 감격과 고마움과 쾌감과 불끈 솟아오르는 인생 승리와도 같은 자신감의 무게가 얼마나 크고 값진 것인지를.


예전엔 안 그랬다.

그러나 지금은 그 사람이 대단해서도 아니고, 나보다 훨씬 유능하고 훌륭해서도 아니다.

선배든 후배든 스승이든 제자든 겸손하고 진솔한 말 한마디 한마디에,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그 사람의 지나온 나날들이 어느 순간 감동으로 파고들어올 때가 있다.

그럴 땐 몸과 마음이 저절로 움직여 박수를 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공연장 같은 데서 여럿이 박수를 칠 때에도 가급적 맨 먼저 박수를 치고 맨 나중까지 열심히 박수를 치는 것을 좋아한다. 박수 받는 사람의 행복한 모습과 마음이 내게 그대로 전달돼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가끔 TV에서도 별 일이 아닌데도 유난히 크게 오래도록 박수를 치는 사람이 있다. 대개 그런 사람은 욕심 없고 순하고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어 참 멋있어 보인다.

그런 멋진 사람들은 유심히 보게 된다. 나도 언젠간 그런 멋진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에.


올 여름 오래된 주택 신축 문제와 관련해 건축사와 상담예약을 해볼까 해서 구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이런 저런 게시물을 보다가 ‘인문학 아카데미 수강생 모집’이라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매주 수요일 오후 2시부터 총 6회로 기획된 [인문학에서 찾는 자아성찰]이란 테마로 대중에게 낯익은 인사나 대학교수들로 구성된 구민 대상 인문학강의였다.


마침 이번 학기는 수요일에 강의가 없기도 하거니와 ‘재미있고 얻어가는 것도 많은 윈윈 강의법’에 대해 늘 고민을 해오던 터라 건축 상담은 제쳐두고 일단 전화로 수강신청을 했다.


최근 대학뿐 아니라 매스컴, 지역문화센터, 신문사, 대형서점, 출판사 등 이 곳 저 곳에서 ‘인문학 콘서트’니 ‘인문학 토크쇼’니 하면서 인문학강좌 붐이 조성되며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인문학강사 스타탄생의 조짐도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예상대로 이미 수강자 인원이 다 차 대기수강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곤 한 동안 잊고 있었는데 강의 시작 하루 전 구청 교육과로부터 수강을 희망한다면 가능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6회 강의 참가비 만원, 참 알뜰하고 실속 있게 색다른 시간을 보내리라 기대하면서 강의비를 바로 입금했다.


그러고 보니 남들보다 한참 늦은 나이인 2008년 2월 박사학위를 받고난 후 6년 동안은 줄곧 강의만 해왔지 내가 강의를 듣거나 수강생이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이 역시 오랜만에 학생으로 돌아가고 싶은 한 가지 작은 설렘이 더해졌다고나 할까.


아무튼 내가 사는 동네 구청에서 구민들의 교양과 인문학 상식을 위해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애써 마련했을 고품격 취지에 적극 동참한다는 의미도 있거니와 어제와는 다른 색다른 만남에 대한 자그마한 기대를 안고 기분 좋게 드디어 첫 강의가 시작 전 난 맨 앞자리에 일찌감치 자리 잡았다.


인문학 첫 강의 강사는 꽤나 이름이 알려진 분이기에 내심 기대도 컸다.

그러나 첫 인문학 강의에 대한 감상평, 짧게 결론부터 말하면 어이없음을 넘어 대실망.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그 말을 절감한 날이다.


그날 두 시간여 정도 이어진 강의 내내 그는 자신의 이야기 한 대목 한 대목이 끝날 때마다 열심히들 박수를 치라고 거의 강요 수준의 멘트를 했다. 강의가 끝나면 그동안 자신이 지은 책들을 박수를 열심히 친 이들에게 선물하겠노라며 강의 중간 중간 강조하더니만, 그것도 기립박수를 친 사람들에게, 게다가 기립박수를 가장 먼저 친 순서대로 나눠주겠노라고 서너 번씩이나 각인을 시켰다.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허탈했다.

첫 날 첫 강의 그 유명하다는 강사가 소리 높여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가물가물한데 자신에게 기립박수를 치라던 쩌렁쩌렁한 울림만 남아 지금 생각해봐도 착잡하고 씁쓸하다.


어떤 면에서는 제 발로 찾아가지 않고서는 접하기 어려운 인생 공부를 면전에서 생생하게 한 탓에 내 생애 첫 경험인 구청 인문학 첫 강의는 이런저런 의미에서 두고두고 잊지 못할 듯싶다.


내 마음속에 사랑과 신뢰와 감동이 넘쳐나야 뜨거운 박수를 치게 되고, 박수치는 이러한 귀하고 순수한 마음이 부메랑이 되어 마침내 나 자신도 사랑받고 감동을 안겨주는 이로 태어나는 것이라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살아오면서 나는 많은 사람에게 축하와 응원의 박수를 건네며 살아왔다.

생각해보면 참 많은 날들을 내 일처럼 박수치며 축하하며 격려하며 흐뭇하게 살아왔다.

나도 언젠가 그들처럼 뜨거운 축하와 격려의 박수를 받을 그날을 그리워하면서.


그러다 아주 가끔은 박수 받는 주인공이 오늘은 나였으면 싶을 때도 없지는 않지만…

변함없이 열정적인 아름다운 이들에게 힘찬 마음의 박수를 보내며 나도 그들처럼 묵묵히 나의 길을 가리라

다짐해본다.

(2014.12.25)

Posted by 오경순
,

평생공부는 선택 아닌 필수

 

근래 들어 대학에는 시간강사란 명칭이 점차 사라지면서 겸임교수, 객원교수, 초빙교수, 강의전담교수, 연구전담교수, 산학협력 전담교수 등으로 바뀌는 추세다.

앞으로는 강사들도 강의평가, 논문 편수, 저역서 실적, 학술활동 업적, 취업성과, 학과 및 학교발전 기여도, 산학협력 실적 등을 반영하며 연봉제로 간다는 둥 설이 분분하다.


물론 박사학위에 전공분야 실력에 강의능력에 전문분야 영역을 뛰어넘는 폭넓은 교양까지 겸비했으나 정기적 의무적으로 세상에 내놓아야 하는 학술논문 생산 작업이 도저히 체질과 적성에 맞지 않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살아가는 학자인 듯 학자 아닌 자유로운 실력파 학자들도 내 주변엔 꽤 많다.


대개 그런 사람들은 교수든 뭐든지 다 열심히 잘할 사람이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대중과 소통하면서 사회를 향해 쓴 소리를 마다않는 이러한 학자들이 많아야 학계가 발전한다는 생각이다. 학계 쪽에서는 경계와 배타의 대상 일순위이긴 하지만.


어찌됐든 상아탑에서는 연구하고 공부하며 잘 가르치는 교원을 대접하고 연구중심으로 나가겠다는 취지이니 바람직한 말이다. 두고 봐야 알겠지만.


일본은 대학 진학률이 해를 거듭할수록 점점 낮아져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현재 일본의 대학 진학률은 50% 선인데 70%를 목표로 대학 당국과 정부가 부심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처럼 대학 졸업 후 당장 취업도 어려운 마당에 대학 진학에 그 많은 비용과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과연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저출산 고령화 시대에 대학이 학생들을 끌어 모으려면 대학 자체의 자정 노력을 통해 우선 교육의 질을 높이고 우수교원 확보가 필수라는 데는 한 목소리를 낸다.


또한 고교 졸업자 수로는 한계가 있어 고령화 시대에 맞추어 평생교육 차원으로 사회인, 직장인, 중장년층을 타깃으로 재차 대학 진학을 유도하며 대학 진학률을 높인다는 것이다.

점차 우리나라 대학들도 평생교육의 방향으로 가지 않을까 싶다.


지난 3월 통계청의 발표에 따르면 2016년 우리나라의 대학 진학률은 69.8%이다. OECD 국가 평균인 40%보다 월등히 높은 수준이다.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등 대부분 유럽 국가들의 대학진학률은 30% 정도이니 괄목할만한 수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는 대학 졸업장을 중시하는 사회 풍토와 교육수준이 일자리와 직결되며 학력수준에 비례해 임금 상승효과가 컸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이러한 기조는 계속 이어질까?


30년 공부해서 20년 일하고 그 후 30년이라는 기나 긴 노후 인생을 보내야 하는 이른바 30-20-30 공식이

통념화된 사회에서 평생공부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세컨드라이프(Second Life)니, 서드라이프(Third Life)니 하지만 정년 후의 계획 없는 주먹구구식의 무모한 삶의 결과는 뻔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중장년층의 재도전, 늦깎이 공부, 정년 후 재충전, 평생공부, 세컨드 라이프(Second Life), 서드 라이프(Third Life), 싱글라이프(Single Life), 행복한 노후, 아름다운 마무리, 정리술(整理術) 등 구체적이고도

먹고사는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고 실용학문 쪽으로 공부와 교육의 관심이 이동될 공산이 크지 않을까 싶다.


게다가 사람답게 사는 웰빙(Well-being), 사람답게 나이 들어가는 웰에이징(Well-aging), 사람답게 죽는 웰다잉(Well-dying), 요컨대 인간학 관련 강연과 출판물에 자연스레 수요가 이어질 전망이고 돈이 되는 이러한 사업은 벌써 움직이고 있다.


한 번도 경험한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초고령화 사회에서는 이러한 시대 흐름을 발 빠르게 파악하고 밑그림을 준비하며 공부하는 자가 고령화 사회 전문가이다.


새로운 시대 흐름에 맞는 새로운 공부를 위해서는 평생공부 외에는 별 뾰족한 대안이 없다.

나이 들어 짐이 되지 않으려면 경쟁력을 갖추는 것, 그것뿐이다.


누군가 공부하는 독종만이 살아남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살아남을 경쟁력이란 ‘평생열정 평생청춘’의 마음가짐으로 공부하고 또 공부할 수밖에.

(2014.12.19) 

Posted by 오경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