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이십 사년 전인 1993년 늦가을 일본 홋카이도(北海道)를 여행할 때 생긴 일이다.

아사히카와(旭川)에서 기타미(北見)를 거쳐 여간 운이 좋지 않으면 늘 짙은 안개 때문에 그 맑고 아름다운

호수를 좀처럼 보기 어렵다는 아칸코(阿寒湖)와 마슈코(摩周湖)를 구경하러 가는 길이었다.

 

단풍이 화려하고 멋진 시월 말 늦가을 저녁.

기타미시에서 외곽으로 벗어난 일차선 작은 도로를 달리던 중이었다. 부슬부슬 내리던 빗방울이 점점 굵어져 장대비로 변하면서 차창 밖은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게 되었고, 가로등 하나 없는 주위는 어느새 칠흑의 어둠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일차선 도로의 바로 옆은 깊게 패인 논두렁.

뒤에서 계속 달려오는 차들 때문에 잠깐 차를 세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좋지 않은 일은 한꺼번에 일어난다고 했던가?

그때 달리던 차의 보닛 (bonnet)에서 갑자기 검은 연기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이상한 굉음소리와 함께

조금씩 나던 연기가 어느새 시커멓게 차를 뒤덮었다. 순간 곧 폭발할 것 같은 무서운 예감이 엄습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쌀쌀한 늦가을의 깜깜한 밤.

한 여행자의 낯선 이국의 초행길에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더 이상 차를 몰 수는 없는 지경이었다. 도로 한쪽에 차를 세워놓고, 사고 표시판을 세우고 사고등을 켜놓았다. 온몸이 비에 젖고 겁에 질려 춥고 떨려왔다. 깜깜한 시골길, 차들이 쏜살같이 달리는 좁은 길 위에 잠시 서 있는 것조차 생명이 위태롭게 느껴졌던 절망의 순간이었다.

 

몇 대의 차들이 그냥 지나쳐 가버리고 난 얼마 후, 조그만 차 한 대가 내 차 뒤에 멈춰 섰다. 그리고 중년 나이 쯤 되어 보이는 한 남자가 차에서 내려 내게 다가왔다. 나는 그에게 눈앞에서 벌어진 자초지종을 대충 전하고 도움을 구했다. 그 사람은 시내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한다.

 

그리고는 마침 그 근처에 그의 친한 친구가 살고 있으니, 일단 그 친구 집으로 가서 몸을 녹이고 난 후에 차를 고쳐보자고 했다. 나는 그를 따라 캄캄한 논길을 한참 걸어 허름하고 자그마한 낡은 목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조그마한 방 두 칸과 부엌이 붙어있는 전형적인 일본식 집의 비좁은 내부였다.

 

연세 지긋하신 두 노부부와 중년의 부부 내외 그리고 손자, 손녀가 막 저녁상을 물린 뒤였다. 나는 따뜻한 차 한 잔을 받아들고, 춥고 떨리던 몸을 녹일 수 있었다. 중년의 두 남자는 잠깐 기다리라며 밖에 나가서는 한참만에야 비에 흠뻑 젖어 돌아왔다. 차의 에어컨에 문제가 있었다고 했다. 에어컨 선을 끊어놓았으니 괜찮을 거라고 했다.

 

고맙다는 인사말 몇 마디로 적당히 얼버무리기에는 도저히 예의가 아닌 듯 했다. 또 한없이 부끄럽고 미안한 일인데, 딱히 나의 마음을 전할 묘안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부족하고 어설픈 인사를 몇 번이고 되풀이하며 집을 나서자, 그 평화롭고 소박한 시골집의 가장인 그 남자가 등 뒤에서 나즈막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부처님 말씀대로 한 것일 뿐, 그 외엔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쪼록 즐거운 여행이 되시기 바랍니다.”

(仏様の教えの通りにしただけで、それ以外の何ものでもありません。この先も樂しいご旅行を.......)

 

마치 꿈을 꾸고 있거나, 영화나 연극 속의 한 장면 같았다. 우연이라 하기에는 정말로 믿기 어려운 거짓말

같은 현실이었다.

 

홋카이도에서 만난 그가 바로 부처였다.

 

한 사람을 두고두고 눈물겹도록 감동케 하는 그런 따뜻하고 정감어린 말 한마디라도 누군가에게 건넨 적이 있었던가?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생면부지의 낯선 사람에게 그런 아름다운 친절을 베푼 적이 있었는가? 그처럼

아름답고 멋진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가?

그날 이후 가끔 나는 이렇게 내게 묻는다.

 

나는 믿는다.

가늘고 희미한 한 줄기 빛조차 전혀 보이지 않는 캄캄한 절망 속에서 이젠 포기해야하는 것 아닐까 하며

괴로워하며 피곤하게 지친 인생에도 가끔은 생각지도 못했던 기적처럼 믿을 수 없는 드라마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또 나는 믿지 않는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어지는 것이며, 어떠한 인생이든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 된다는 사실을.

 

살아가면서 날마다 새로운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여간 즐겁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생각해보면 값진 선물과도 같은 기분 좋은 일이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힘이 된다.

 

올 한해도 벌써 많은 사람들과 첫 인사를 주고받았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소중한 사람들이다.

한없이 고맙고 감사하다.

 

2014년도 이젠 며칠밖에 남지 않았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홋카이도에서 내가 만난 부처(仏様)가 떠오른다.

그러다보면 이런 저런 궂은일도 다 위로와 위안이 된다.

 

‘지나간 날들은 언제나 젊고,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언제나 새로운 도전’

이렇게 각오를 다지며 다가오는 멋진 새해를 소망한다.

 

 

(2014.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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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오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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