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을 쓸까? 번역을 할까?

 

요즘 번역가는 많지만 믿고 맡길만한 제대로 된 번역가 찾기가 쉽지 않다고들 한다.

왜 그럴까?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과연 우리 사회가 제대로 된 번역과 번역가에 걸맞는 대우와 평가를 하고

있느냐와 관련된 문제다.

 

모든 투자의 기본 룰은 ‘High Risk High Return’이 원칙이다.

‘Low Risk High Return’ 운운하며 유혹한다면 그 건 투자가 아니라 사기다.

 

그러나 번역만큼은 다르다.

번역은 누가 뭐래도 ‘Low Risk High Return’의 투자다.

이 말에 딴지를 걸 사람이 혹시 있을까.

 

번역은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수준 높은 문화를 들여와 우리의 삶과 문화를 살찌운다.

모든 문화 한 가운데 번역이 존재한다.

번역을 문화의 힘으로 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요컨대 번역은 문화이자 문학이고 예술이다.

고로 번역가는 고도의 창조적 문화메신저라 할만하다.

 

그러나 번역은 꽤 수준 높은 스칼라십이 필요한 지난한 작업이다.

더욱이 학술번역서는 학술논문보다 몇 배의 시간과 품이 요구된다.

한 권의 학술번역서를 제대로 번역하려면 많은 관련 서적이나 번역서, 참고자료 등을 읽어내야 한다.

 

그러나 교수임용 시나 대학에서 실적이나 업적을 평가하는 경우 대개 번역서는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한다.

학술활동 실적, 업적에 기입란조차 없는 경우가 태반이며 홀대받는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어느 학자가 선뜻 번역을 하겠는가?

그것도 몇 년씩이나 붙들고 있어야 할지 모르는 번역을.

 

까뮈를 전공하는 인문학자들에게 “그의 대표작『이방인』을 번역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그것에 대한 논문

한 편을 쓰시겠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십중팔구는 논문을 쓰겠다고 할 것이다. 다 이런 연유에서 이리라.

 

한 편의 학위논문을 내면 과연 몇 사람이나 그 논문을 읽는지 어느 일본인 학자가 통계를 낸 적이 있었다.

놀랍게도 학위논문 한 편 당 1.5명이었단다. 그것도 그 1.5명 안에는 논문 쓴 저자까지 포함된 수치란다.

다시 말해 저자를 빼고는 평균 한 사람도 읽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떨까?

 

<지나치게 큰 '논문'의 위력>이란 칼럼을 쓴 부산대학교 중문과 김세환 교수의 인문학자와 인문학 논문에

관련된 칼럼 일부분을 들여다봐도 논문을 읽는 사람 수는 일본의 사정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인문학 분야 논문은 대체로 본인을 포함해 보는 사람이 없다. 2011년 한국연구재단은 어느 두 인문사회

학술지에 실린 논문 110편이 국내에서 한 번도 인용되지 않았다는 분석 결과를 공개했다.

학위논문도 다르지 않다. 그 논문을 다시 볼 일은 거의 없다.

인문학자는 창작이나 저술로 자신의 학문을 학교나 사회와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학문은 고귀해서 대중화될 수 없다는 편견이 아무 의미도 없는 논문을 쓰게 한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면 쓰레기와 무엇이 다른가?“ [조선일보: 이슈진단 (2013.4.5)]

 

그러나 번역서는 아무리 안 읽는다 해도 한 권당 적어도 수백 명 정도는 읽지 않겠는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사회적 기능과 기여도만 따져보더라도 번역과 논문은 이렇게 확연한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번역에 대한 우리 사회 대다수의 인식과 학계의 시선은 여전히 제한적이며 관심 밖이다.

우리의 번역 실상이 참 부끄럽고 슬프다.

 

일찍이 김용옥은『東洋學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논문의 허구성과 번역의 어려움에 대해 이렇게 토로한 바 있다. 새삼 공감가는 대목이다.

 

“일본 학계에서는 한 학자를 평가하는 데 번역을 제일의 업적으로 평가한다. 이유는 번역이 학문 활동 중에서 가장 긴 시간과 가장 수준 높은 스칼라십을 요구하기 때문이다.「~에 관한 논문」을 쓰는 일은 그것에 대한 철저한 지식이 없더라도 가능하다. 해석이 안 되는 부분은 슬쩍 넘어갈 수 있고, 또 책을 다 읽지 않더라도

적당히 일관된 논리의 구색만 갖추면 훌륭한 논문이 될 수 있다. 허나 번역의 경우는 전혀 이야기가 다르다. 그 작품의 문자 그대로 ‘완전한’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모르는 부분을 슬쩍 넘어갈 수 도 없고 또 전체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부분의 철저한 해석조차도 불가능하다.”

 

일본은 이미 노벨문학상 작가를 두 명이나 배출해냈다.

아시아에서는 단연 톱이다.

메이지시대부터 이어져 온 명실상부한 번역대국으로서 이름값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1968년 소설『설국(雪國)』으로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岡成)와 1994년에『만엔 원년의 풋볼(万延元年のフットボール)』로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또 다시 세 번째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만들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해마다 무라카미 하루키 등 유명

인기 작가들이 물망에 오르내리고 있다.

 

번역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설국』을 번역하여 일본 최초의 노벨문학상을 안긴 번역가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Edward Seidensticker)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자신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지명된 직후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상의 절반은 번역자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의 몫이다.”

 

얼마나 멋지고 부러운 멘트인가.

번역과 번역가를 대우하고 평가하는 번역대국 일본과 우리나라의 인식 차이다.

우리도 한국의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가 시급하다.

 

그래야 나부터도 주저 없이 ‘논문을 쓰느니 번역을 하지’

(2014.12.30)

 

Posted by 오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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